The Cambridge History of Philosophy of the Scientific Revolution Part II
8. The Art of Thinking
8.1. 서론 및 ‘사유의 기술’의 개념적 배경
1. 개념의 등장과 대중화
- 17세기 후반, 케임브리지(Cambridge)의 고고학자 토마스 베이커(Thomas Baker)는 그의 저서 《학문에 대한 성찰(Reflections upon Learning)》(1699)에서 “현대적 어구로 표현하자면 논리학은 사유의 기술(Art of Thinking)이자 이성의 조력자 혹은 도구이다”라고 기술하였다.
- 이 ‘사유의 기술’이라는 표현을 널리 대중화한 것은 앙투안 아르노(Antoine Arnauld)와 피에르 니콜(Pierre Nicole)이 공동 저술한 《논리학 또는 사유의 기술(La logique, ou l’art de penser)》(1662), 즉 일명 ‘포르 루아얄 논리학(Port Royal Logic)‘의 제목이었다.
2. 역사적 맥락과 연구의 목적
- 이 시기 지식인들은 ‘사유의 기술’이라는 용어를 페트루스 라무스(Petrus Ramus),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니콜라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 존 로크(John Locke),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고대와 근대의 다양한 방법론을 아우르는 일반 명사로 사용하였다.
- 본 챕터의 저자인 소라나 코르네아누(Sorana Corneanu)와 쿤 페르메이르(Koen Vermeir)는 초기 근대 논리학과 방법론을 17세기 후반 학계를 뜨겁게 달군 ‘고대인과 근대인의 논쟁(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이라는 구체적인 텍스트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 이 논쟁은 계몽주의 서사(narrative of Enlightenment)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논리학이 ‘사유의 기술’로 재브랜드화되는 과정은 양측 진영 모두에게 핵심적인 관심사였다.
8.2. 고대인과 근대인의 논쟁 속 논리학의 구도
- 이 논쟁은 흔히 문학사적 사건으로만 치부되기 쉽지만, 사실 과학사와 철학사에서도 지극히 중요한 이정표이다.
- 고대인과 근대인의 학문적 우열을 비교할 때, 논리학과 방법론을 다룬 장(chapter)은 언제나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의 성과를 평가하는 논쟁의 핵심 축(fulcrum)으로 작용하였다.
- 수사학이나 시학에서는 고대인의 우수성이 쉽게 인정되었으나, 새로운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는 진보의 유무를 두고 격렬한 진영 싸움이 벌어졌다.
8.2.1. 1670년대: 포아송과 라팽의 초기 대립
- 니콜라 포아송(Nicolas Poisson)의 근대파 옹호 (1670)
- 오라토리오회 신부이자 데카르트주의 선전가였던 그는 《르네 데카르트 방법론에 대한 주석 또는 비평(Commentaire ou remarques sur la méthode de René Descartes)》에서 스콜라 학파의 ‘통속적(vulgar)’ 논리학과 ‘최신(recent)’ 논리학을 비교하는 ‘평행선(parallel)’을 제시하였다.
- 그는 레이문두스 룰루스(Raymond Lull),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루돌프 아그리콜라(Rudolph Agricola), 후안 루이스 비베스(Juan Luis Vives), 페트루스 라무스(Petrus Ramus),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요하네스 클라우베르크(Johannes Clauberg) 등을 근대 논리학의 선구자로 묶으며, 이들이 모두 ‘이성의 인도와 판단의 형성’이라는 데카르트적 대원칙에 동의한다고 주장하였다.
- 르네 라팽(René Rapin)의 고대파 반격 (1676)
- 루이 14세 치하에서 고대 옹호론의 기수였던 예수회 비평가 라팽은 《고대 및 근대 철학에 대한 성찰(Reflections sur la philosophie ancienne et moderne)》을 통해 포아송의 견해에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 그는 사유와 담론의 기술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이룩한 성취가 결정적이며 절대적임을 강조하고, 전통을 파괴하려는 근대인들(베이컨, 데카르트, 지롤라모 카르다노(Girolamo Cardano), 얀 바普티스타 반 헬몬트(Jan Baptist Van Helmont),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의 시도를 미완성의 무모한 도전으로 격하하였다.
- 다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유산을 혁신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킨 폴란드 예수회 학자 마르티누스 스미글레키우스(Martinus Smiglecius)와 의사이자 철학자인 오노레 파브리(Honoré Fabri)의 강의를 출판한 피에르 무슨리에(Pierre Mousnier) 같은 근대 저술가들은 예외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8.2.2. 1680년대~1690년대 초: 폰트넬과 코스트의 논쟁 심화
- 근대파의 격찬 세력 (1687~1691)
- 1680년대에 이르러 논쟁은 근대주의에 대한 찬양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의 시 낭독과 베르나르 르 보비에 드 폰트넬(Bernard le Bovier de Fontenelle)의 《고대인과 근대인에 관한 일탈(Digression sur les anciens et les modernes)》(1687)이 기폭제가 되었다.
- 폰트넬은 과학이 올바른 추론(justesse du raisonnement)과 데카르트적 사유 방식(manière de raisonner)에 기반하며, 이 능력은 시간을 거치며 점진적으로 정교해지기 때문에 과학 분야에서는 근대인이 필연적으로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고 논하였다.
- 피에르 코스트(Pierre Coste)의 대변 (1691)
- 개신교 신학자이자 번역가였던 코스트는 데카르트주의자 피에르 실뱅 레지(Pierre Sylvain Régis)의 《철학 전서(Cours entier de philosophie)》에 덧붙인 〈철학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a philosophie)〉에서 라팽의 고대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 코스트는 철학적·과학적 사유가 근대에 이르러 최고의 완숙기에 도달했음을 입증하고자 했으며, 근대의 핵심 논리학자로 피에르 가상디(Pierre Gassendi),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니콜라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 그리고 피에르 실뱅 레지(Pierre Sylvain Régis) 본인을 꼽았다.
8.3. 영국의 논쟁 구도와 캐논(Canon)의 다원성
8.3.1. 영국의 고대파와 근대파 대립 (1690년대)
- 윌리엄 템플(Sir William Temple)의 근대파 비판 (1690)
- 영국의 정치가이자 수필가였던 템플(Temple)은 학문 연구의 역사를 다룬 글을 통해 근대인들의 학문적 신규성과 우월성 주장이 기만적이라고 공언하였다.
- 그는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는데, 근대인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발견들이 사실은 고대의 원천(old Fountains)에서 유래한 것에 불과하거나 규명되지 않은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하였다.
- 이는 프랑스의 라팽(Rapin)이 데카르트(Descartes)의 원리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자연사 저작에 이미 근대 과학이 자랑하는 발견의 첫 실마리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 윌리엄 워턴(William Wotton)의 반박과 근대 논리학의 정당화 (1694)
- 고전 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워턴(Wotton)은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의뢰를 받아 템플(Temple)의 주장에 전면 반박하는 《고대 및 근대 학문에 대한 성찰(Reflections upon Ancient and Modern Learning)》을 출판하였다.
- 워턴(Wotton)은 논리학, 즉 ‘사유의 기술’ 또는 ‘추론의 기술‘을 ‘모든 지식의 기초(Foundation of all Knowledge)‘로 선언하고, 이 기술의 핵심은 과학에서 실제 발견을 이끄는 역량에 있다고 역설하였다.
- 그는 학교(schools)에서 가르치는 전통적인 ‘스콜라식 삼단논법과 논쟁의 기술(Art of Disputing, and making Syllogisms)‘에 맞서, 베이컨(Bacon)식의 ‘실재적 학문의 진보(Advancement of real Learning)‘를 옹호하였다. 그는 근대적 성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존 로크(John Locke),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E. W. Tschirnhaus)를 지목하였다.
- 기타 근대파 인물들의 캐논
- 워턴(Wotton) 외에도 치른하우스(Tschirnhaus), 윌리엄 몰리뉴(William Molyneux), 장 르 클레르(Jean le Clerc) 등은 비(非)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짧은 루미나리(luminaries, 선구자) 목록을 제시하였다. 이들의 목록에는 데카르트(Descartes), 포르 루아얄 논리학(Port Royal Logic), 말브랑슈(Malebranche), 로크(Locke)와 더불어 에드므 마리오트(Edme Mariotte) 등이 포함되었다.
8.3.2. 라이프니츠의 절충주의와 베이커의 회의주의 (1690년대 후반)
-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통합적 관점 (1697)
- 워턴(Wotton)의 저작은 토마스 버넷(Thomas Burnett)을 거쳐 라이프니츠(Leibniz)에게 요약 전달되었다.
- 라이프니츠(Leibniz)는 가브리엘 바그너(Gabriel Wagner)에게 보낸 서한에서 고대인과 근대인 모두가 논리학에 공헌했음을 인정하는 irenic(화해적인) 관점을 취하였다.
- 그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포르피리오스(Porphyry), 라무스(Ramus)와 라무스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카르다노(Cardano), 베이컨(Bacon), 데카르트(Descartes), 요아힘 융기우스(Joachim Jungius), 빈센트 플라키우스(Vincent Placcius), 요하네스 펠덴(Johannes Felden) 모두가 발견과 판단에 있어 ‘오성을 사용하는 기술(art of using the understanding)‘에 유의미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하였다.
- 토마스 베이커(Thomas Baker)의 전면적 회의주의 (1699)
- 라이프니츠(Leibniz)의 화해적 태도와 달리, 베이커(Baker)는 인간 오성의 취약함(Weakness of Humane Understanding)을 증명하여 종교적 계시(revelation)의 필요성을 역설하려는 목적으로 고대와 근대 양측을 모두 깎아내렸다.
- 그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삼단논법 기술과 베이컨(Bacon)의 자유 사유 방식(way of free thinking)을 모두 지식의 유약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폄하했으며, 라무스(Ramus), 데카르트(Descartes), 치른하우스(Tschirnhaus)의 논리학 역시 부적절하고 포르 루아얄 논리학(Port Royal Logic)의 정수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훔쳐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8.3.3. 캐논의 plurality(복수성)와 역사학적 의의
- 당대 논쟁 과정에서 작성된 여러 사유의 기술 저자들의 캐논(본문의 Table 8.1 참고)을 살펴보면, 라무스(Ramus), 베이컨(Bacon), 데카르트(Descartes), 포르 루아얄(Port Royal), 말브랑슈(Malebranche), 로크(Locke)가 빈번히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단일한 표준적 캐논에 대한 합의는 부재했음을 알 수 있다.
- 이 목록들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표준적인(canonical) 학자뿐만 아니라 비표준적인(non-canonical) 학자들이 뒤섞여 존재하였다.
- 당대 행위자들에게 이들은 전통과의 단절 여부와 무관하게 근대 논리학 영역 내의 뚜렷한 구성원들이었으며, 이는 19세기적 캐논에 사로잡힌 현대 철학사와 과학사의 서사를 문제화하고 보완해 주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8.4. 마음에 대한 초점 (The Focus on Mind)
8.4.1. 자연 논리(Natural Logic)의 전제와 이중적 성격
논쟁의 고대파와 근대파를 막론하고 모든 참여자는 ‘사유의 기술’이 인간 마음이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휘하는 구조화된 절차를 단순히 확장하고 명료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 동의하였다.
- 즉, 이 인스트루멘탈(instrumental, 도구적)하고 실천적인 예술은 마음의 내재적 작동 상태인 ‘자연 논리(logica naturalis)‘의 존재를 상정하였다.
-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차원의 논의를 수반하였다.
- 마음의 조작적 토대
- 논리학의 기초를 마음의 실제 작동 방식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 이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학파 및 가상디(Gassendi), 포르 루아얄(Port Royal), 데카르트주의자들이 채택한 3대 정신 작용인 ‘단순 파악(simple apprehension)’, ‘판단(judgment)’, ‘추론(reasoning)‘(간혹 ‘질서화(ordering)‘가 네 번째 작용으로 추가됨) 모델로 나타나거나, 혹은 라무스(Ramus)와 베이컨(Bacon)이 기저로 삼은 키케로(Cicero) 전통의 2대 정신 작용인 ‘발명/수사(invention)‘와 ‘판단(judgment)’ 모델로 구체화되었다.
- 인간의 천부적 내재 능력
- 각 철학자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닌 고유한 논리적 절차에 주목하였다.
- 라무스(Ramus)에게 발견과 판단의 규칙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작용이었고, 베이컨(Bacon)은 마음이 편견인 ‘우상(idols)’에 오염되지만 않는다면 본성적으로 귀납의 경로를 따른다고 보았다.
- 데카르트(Descartes)는 직관(intuition)과 연역(deduction)을 본유적인 ‘이성의 빛(light of reason)’에서 나오는 활동으로 규정하였으며, 로크(Locke)는 인간의 오성에 관념들의 일치 및 불일치를 지각하는 ‘천부적 능력(native Faculty)’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반면 고대파의 라팽(Rapin)은 삼단논법이야말로 통상적인 추론 방식에 가장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도구라고 확신하였다.
8.4.2. 마음의 확장: 지성(Intellect)을 넘어선 다각적 고찰
사유의 기술이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는 학문과 결합함에 따라, 근대 옹호론자들이 내세운 논리학의 지평은 단순한 순수 지성(intellect)의 영역을 넘어섰다.
- 베이컨(Bacon)은 인간 영혼의 능력에 관한 학설의 일환으로 논리학을 다루었고, 데카르트(Descartes)는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의 제12규칙에서 마음의 작용 메커니즘을 다루었으며, 말브랑슈(Malebranche)와 로크(Locke) 역시 마음의 능력과 정념에 관한 오성론적 연구를 논리학과 연계하였다.
- 이 과정에서 상상력(imagination), 기억(memory), 정념(passions), 신체(body) 자체가 논리학적 탐구의 장으로 포섭되었다.
- 상상력과 기억의 논리적 기능
- 상상력은 정념 및 신체적 영(bodily spirits)과 결합하여 마음의 오류와 악덕을 유발하는 부정적 Faculty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나(베이컨, 말브랑슈, 로크), 홉스(Hobbes)와 가상디(Gassendi) 등에게는 논리적 행위를 부분적으로 담당하는 요소로, 데카르트(Descartes), 말브랑슈(Malebranche), 치른하우스(Tschirnhaus)에게는 논리적 사유를 보조하는 긍정적 요소로 다루어졌다.
- 기억 또한 베이컨(Bacon)의 자연사 탐구나 클라우베르크(Clauberg)의 추론 과정을 보조하는 핵심 장치로 평가되었으며, 인간의 복합적 재능인 인게니움(ingenium) 개념 역시 논리적 삶의 연장선상에서 다각도로 조명되었다.
8.4.3. 오류론의 전환과 정신의 의학(Medicina Mentis)
사유의 기술이 지닌 또 다른 중대한 임무는 마음을 안내하고 교정하며 향상시키는 데 있었다.
- 포아송(Poisson), 코스트(Coste), 그리고 고대파인 라팽(Rapin)마저도 이를 데카르트적 표제인 ‘판단을 형성하는 기술(art of forming judgment)‘로 수용하였다.
- 오류 개념의 내재화
- 근대파 논리학에서 오류는 단순한 ‘형식적 타당성의 위반’(전통적 스콜라 학파의 관점)이라는 외재적 결함이 아니라, 마음의 능력 자체가 오작동하거나 왜곡되어 발생하는 내재적 산물, 즉 ‘오성의 약함‘으로 규정되었다.
- 이는 베이컨(Bacon)의 ‘우상‘이나 데카르트(Descartes)의 ‘유년기 편견’ 모델로 대두되었으며, 클라우베르크(Clauberg), 포르 루아얄(Port Royal), 마리오트(Mariotte), 치른하우스(Tschirnhaus), 말브랑슈(Malebranche), 로크(Locke)의 저술 속에서 다채롭게 변주되었다.
- 치유적 논리학과 삶의 기술
- 논리학은 오류를 극복하고 망가진 정신 기능을 수리하는 치유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 이에 따라 논리학은 올바른 삶을 영위하기 위한 보편적 실천의 일부가 되었으며, 베이컨(Bacon), 클라우베르크(Clauberg), 말브랑슈(Malebranche), 치른하우스(Tschirnhaus) 등은 마음의 질병을 치료한다는 의미의 ‘정신의 의학(medicina mentis)‘이라는 의학적 은유를 명시적으로 사용하고 신체의 의학과의 상호의존성을 역설하였다.
- 흥미롭게도 고대파가 옹호한 파브리(Fabri)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오류 접근법이 관찰된다.
구조화된 포맷과 학술적인 ‘-이다’체, 원어 병기 원칙을 고수하여 다음 내용인 [8-4. 과학적 실천에 대한 초점 (The Focus on Scientific Practice)] 부분을 상세히 정리한다.
8.5. 과학적 실천에 대한 초점 (The Focus on Scientific Practice)
8.5.1. 학문의 보편적 토대로서의 논리학과 진영 간의 평가
- 고대파인 라팽(Rapin)은 새로운 근대 철학자들이 “논리학보다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에 더 중독되어 있다”라고 한탄한 반면, 근대파인 워턴(Wotton)은 새로운 추론의 기술이 물리적, 형이상학적, 수학적 사안에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찬양하였다.
- 또한 포르 루아얄 논리학(Port Royal Logic)에 대해서도 포아송(Poisson)은 “역사, 도덕, 물리학, 형이상학을 매개로 논리학의 규칙을 적절하게 응용했다”라고 칭찬한 반면, 베이커(Baker)는 “아르노(Arnauld)가 제시한 예시들은 다른 과학에서 가져온 것이어서 인간이 이미 지혜롭다는 것을 전제한다”라고 비판하였다.
- 이처럼 사유의 기술이 지닌 실제적 응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 동의하였으나, 그 가치에 대한 평가는 상이하였다.
-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핵심 쟁점이 맞물려 있었다. 하나는 논리학이 다른 과학들과 맺는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학의 규칙과 이를 동반하는 구체적 예시들 사이의 관계이다.
8.5.2. 총체적 성격(Totalizing Tendency)과 지식 체계의 조직
논리학을 ‘예술 중의 예술이자 과학 중의 과학’으로 규정하는 전통적인 관념은 논쟁의 참여자들이 참조한 초기 근대 사료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 라무스주의의 체계화
- 변증학을 일종의 상위 과학 혹은 방법론으로 전환하여 지식의 전 영역을 분할하고 조직하고자 했던 시도는 라무스(Ramus) 철학의 독특한 이정표였다.
- 이른바 ‘라무스식 나무(Ramist trees)‘를 활용하여 모든 지식을 분류하는 방식은 요한 하인리히 알스테드(Johann Heinrich Alsted), 클레멘스 팀플러(Clemens Timpler), 바르톨로메우스 케커만(Bartholomäeus Keckermann) 같은 후기 라무스주의자들이 백과사전과 거대한 시스템을 개발하는 뿌리가 되었다.
-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생산적 논리학
- 이러한 총체적 경향은 베이컨(Bacon)과 데카르트(Descartes)에게서도 관찰되는데, 이들의 거대한 목표는 기존 지식의 단순한 교수(teaching)나 조직화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의 ‘생산(production)’에 있었다.
- 이들의 논리학은 자신들이 구상한 지식의 나무에 수분을 공급하는 뿌리이자 수액으로 제시되었다.
- 다만 베이컨(Bacon)의 탐구 기술은 개별 사실들로부터 일반적인 자연적 본성으로 나아가는 ‘귀납적 자연사‘의 형태로 구체화된 반면, 데카르트(Descartes)는 초기부터 ‘수학’을 통해 가장 잘 구현되는 ‘보편과학(universal science)’ 혹은 방법론을 묘사하였다.
8.5.3. 논리 규칙과 예시의 관계: 생성론 대 예시론
논리학이라는 학문이 구체적인 개별 학문 분야들을 예시하는 것에 불과한지, 아니면 실제로 그 학문들을 발생시키는지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쟁점이었으며, 이는 규칙과 예시의 역학 관계로 이어졌다.
- 예시가 규칙을 생성한다는 입장
- 라무스(Ramus)의 변증학에서는 구체적인 예시들이 규칙을 생성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으며, 이는 자연 논리의 개념적 기초가 되었다.
- 그의 제자들은 시인, 철학자, 수학자들의 실제 추론 사례로부터 토피카(topical, 토포스)와 삼단논법의 규칙을 이끌어내야 했다.
- 로크(Locke)의 프로젝트는 이보다 더 강력하여, 오성에 관한 그의 자연사적 조사는 자연철학, 도덕, 신학 등 모든 지식 영역에서 마음에 행하는 실제 활동들을 관찰하고 채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 규칙이 예시를 통해 예시(illustrate)된다는 입장
- 반면 포르 루아얄 논리학(Port Royal Logic), 말브랑슈(Malebranche), 치른하우스(Tschirnhaus) 등 데카르트주의 논리학에 등장하는 예시들은 당대의 실험 과학이나 수학적 성과로부터 주로 유래하였으며, 수사학, 도덕, 형이상학적 영역의 사례를 포함하여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적 방법론 규칙들을 ‘설명하고 예증하는’ 성격을 가졌다.
- 반면 마리오트(Mariotte)는 이러한 단순 예증적 기능을 거부하고, 예시들을 자연과학 연구를 직접 안내하고 추동하는 ‘방법론적 지침(methodological indications)‘으로 격상시켰다.
- 결과적으로 고대인과 근대인의 논쟁 참여자들과 그 사료들에게 있어 사유의 기술은 논리학과 개별 과학적 실천 사이의 상호 교차적 비옥화(cross-fertilization)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논리학이 보편적 지식 시스템의 기초이자 실체여야 하는지, 혹은 개별 과학의 방법론적 중추에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완벽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8.6. 발견에 대한 초점 (The Focus on Discovery)
8.6.1. 발견 개념의 다의성과 논쟁의 핵심
- 발견(discovery)에 관한 문제는 신규성(novelty)의 가치를 평가하는 고대인과 근대인의 논쟁에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논쟁적인 주제였다. 과학에서 실제적인 발견을 보장하는 정당한 절차가 무엇인지를 두고 격렬한 평가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 당대의 일반적인 언어에서 ‘발견’은 혈액 순환과 같은 현상의 발견이나 망원경 같은 기술적 발명(inventions)을 지칭하기도 하였으나, 논리학적 맥락에서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제한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 결론이나 정론의 발견
- 원리로부터의 연역(deduction)을 통해 결론을 이끌어내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이는 삼단논법적 형식이든 수학적 형식이든 간에 확실성 혹은 학적 지식(scientia)이라는 이념을 내포하며, 고대인과 근대인 모두가 공유했던 갈망이었다.
- 원리의 발견
- 증명(demonstration)의 전제가 되는 제일 원리나 명제 자체를 확립하는 경로를 의미한다. 전통적인 학문 방법론이 새로운 원리의 발견을 저해하고 억압한다는 근대파의 공격이 집중된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 논거의 발견
- 인문주의 전통의 변증학적 수사(inventio) 절차와 결합된 방식이다. 베이컨(Bacon)은 이러한 논거적 발견(topical discovery)을 재해석하여 명제와 원리를 발견하는 본연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에 봉사하도록 재구성하였다.
8.6.2. 분석-종합(Analysis-Synthesis) 및 발견-증명의 역학 관계
원리의 발견(위의 두 번째 의미)과 결론의 증명(위의 첫 번째 의미)은 전통적으로 분석-종합(analysis-synthesis) 또는 해상-조합(resolution-composition)이라는 대등한 쌍으로 표현되었다.
- 이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삼단논법에서 현상(효과)과 원인 사이를 오가는 상승·하강 경로, 혹은 수학에서 미지의 가정으로부터 기지의 원리로 거슬러 올라간 뒤 다시 공리로부터 정리를 유도하는 기하학적 절차 등 다양한 전통의 축적물이었다.
- 초기 근대 방법론 논쟁에서 참여자들은 이 쌍을 발견과 증명의 단계와 연결 지었으나, 그 세부 결합 방식은 철학자마다 상이하였다.
- 단계의 엄격한 분리
- 포르 루아얄 논리학(Port Royal Logic), 마리오트(Mariotte), 레지(Régis) 등은 분석/발견의 단계와 종합/증명의 단계를 명확히 분리하여 사유의 기술을 전개하였다.
- 혼합 및 분석의 자족성
- 홉스(Hobbes)는 발견을 위해 분석과 종합의 결합이 필수적이라고 보면서도 이를 증명(종합) 단계와는 구별하였다. 반면 말브랑슈(Malebranche)와 치른하우스(Tschirnhaus)의 체계에서는 분석 자체가 발견과 증명적 확실성을 모두 보장하는 단일한 절차로 격상되었고, 종합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학문 영역별 분리
- 베이컨(Bacon)은 수사와 판단이 분리되더라도 발견 과정이 증명의 힘을 수반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가상디(Gassendi)는 분석과 종합이 수사와 판단 모두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로크(Locke)의 경우, 수학 영역에서는 발견과 증명이 긴밀하게 결합되지만, 자연철학 영역에서는 확실한 증명이 불가능하므로 원리가 아닌 개별 사실들의 발견(자연사)만이 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8.6.3. 삼단논법과 대안적 발견 절차의Authority 논쟁
과학적 발견과 증명을 담보하는 구체적인 도구를 두고, 전통적인 삼단논법(syllogism)의 권위와 근대파가 내세운 대안적 절차들 사이에서 격렬한 조율과 갈등이 일어났다.
- 삼단논법 격하와 수학적 모델의 대두
- 삼단논법을 단지 새로운 발견이 불가능한 ‘말싸움과 사유의 고착화(culture of mere disputation and speculation)‘의 도구로 비판하는 수사는 가상디, 베이컨, 데카르트, 반 헬몬트, 로크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다.
- 홉스(Hobbes), 데카르트(Descartes), 포르 루아얄(Port Royal), 마리오트(Mariotte) 등은 명백한 원리(공리나 정의)에서 출발하여 확실한 결론으로 선형적으로 이행하는 ‘수학적 증명 모델‘을 표준으로 삼았다.
- 데카르트는 삼단논법을 완전히 배격한 반면, 홉스와 포르 루아얄 저자들은 제한적인 자리를 남겨두었다.
- 고대파의 삼단논법 정당화
- 반면 고대파의 옹호자들은 삼단논법이 그 자체로 혹은 수학적 증명과의 상호 보완을 통해 강력한 증명력을 제공한다고 항변하였다.
- 라팽(Rapin)은 펠덴(Felden)이나 파브리(Fabri)의 논리를 이어받아 삼단논법이 기하학적 증명 방법(Geometrical Method of Demonstration)을 압축하고 있다고 정당화하였다.
8.6.4. 원리 발견을 위한 방법론적 다원성
과학적 원리를 발견하는 상이한 방법론적 노선 역시 사료들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 실험적-논리적 분석
- 베이컨(Bacon)은 논리적 해상(resolution)과 복합물을 근본 원소로 분리하는 화학적 용해(solutio)를 연속적인 선상에 놓는 ‘실험적-논리적 분석‘을 제안하였다.
- 이는 표(tables)로 정리된 자연사와 실험사에 의해 단계별로 통제되는 배제적 귀납법(eliminative induction)의 형태를 띠었다.
- 마리오트(Mariotte) 역시 관찰과 귀납을 수학의 보조를 받는 문제 해결 절차로 파악하여 실험과 수학적 모델을 결합하였다.
- 데카르트적 수학적 분석
- 데카르트(Descartes)가 《방법서설(Discourse on the Method)》에서 제시한 규칙들, 특히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는 ‘순서의 규칙‘은 근대 논리학에서 수학적 분석의 실체로 받아들여졌다.
- 그러나 이를 특수한 사례에서 일반 원리로 상승하는 정통 분석학으로 읽고 종합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본 진영(포르 루아얄, 레지)이 존재했던 반면, 대상을 단순히 비교하여 수학적 관계(rapports)나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자족적인 증명 형태로 간주한 진영(말브랑슈, 치른하우스)도 존재하여 분석의 해석을 둘러싸고 내부분열을 겪었다.
- 결론적으로 ‘분석’과 ‘발견’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전통의 결합 속에서 유동적이고 모호하게 사용되었으나, 당대 논쟁가들은 이질적인 세부 결합 방식을 ‘발견’이라는 하나의 강력하고도 승리주의적인 표제 아래 포섭함으로써 근대적 사유의 기술이 지닌 핵심 이표로 삼았다.
8.7. 결론 (Conclusion)
8.7.1. 사유의 기술을 통한 근대성의 역사적 가공
본 장에서 다룬 접근법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전환되는 시기, 즉 고대인과 근대인의 논쟁(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이 한창이던 시점에 ‘근대적 사유의 기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단련되고 주조되었는지 추적하는 것이었다.
- 이 치열한 논쟁 과정에서 사유의 기술은 고전적 사유와의 단절(break) 혹은 연속성(continuity)이라는 상반된 도식 속에서 해석되었으나, 양측 모두 논리학을 철학 및 새로운 과학의 가치와 신규성을 평가하는 광범위한 담론의 도구로 징발하였다.
- 비록 논쟁의 참여자들이 편향되거나 간혹 신뢰하기 어려운 관찰자였다 할지라도, 이들의 시선은 초기 근대 논리학이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정점에서 ‘철학적’ 혹은 ‘과학적’ 근대성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는지 선명하게 보여 준다.
8.7.2. 통합적 가치와 다원적 지형의 공존
지식인들의 자기성찰적 노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이 시기에 탄생한 ‘사유의 기술’의 이미지는 통일성(unity)과 다양성(diversity)이라는 이중적 특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 통일성적 측면
- 논쟁의 모든 진영이 공유했던 공통의 표제(mots d’ordre)에서 비롯된다.
- 이들은 새로운 논리학이 인간 마음의 ‘자연 논리‘를 반영해야 하고, 오작동하는 정신을 교정하는 Remedy(치료제)가 되어야 하며, 보편적이든 개별적이든 과학적 실천의 기초를 확립하고, 궁극적으로 자연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경로를 열어 주어야 한다는 핵심 가치에 묵시적으로 합의하고 있었다.
- 다양성적 측면
- 이러한 가치를 채우는 세부적인 내용과 역사적 캐논(canon)의 구성에서는 심각한 헤테로지니어티(heterogeneity, 이질성)와 다원성이 관찰되었다.
- 누구를 표준적 학자로 볼 것인가에 대한 목록의 불일치, 그리고 마음의 메커니즘, 과학적 예시의 위상, 분석과 발견의 절차를 규정하는 방식의 내부적 균열은 사유의 기술이 결코 단일한 정형적 교의가 아니라 다방향적인 논쟁적 구성물(polemical construct)이었음을 반증한다.
8.7.3. 과학 혁명 및 현대 역사학과의 메타적 연결
- 현대의 최근 과학사 학계는 과학 혁명 자체를 이와 유사하게 역동적이고, 논쟁적이며,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띨 수밖에 없는 과정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본 장이 조명한 사유의 기술을 둘러싼 초기 근대 논쟁의 지형은 과학 혁명을 바라보는 이러한 현대적 다원주의 시각을 그대로 거울처럼 반영하고 뒷받침한다.
- 나아가 17세기 ‘새로운 과학’과 ‘아리스토텔레스적 과거’ 사이의 역학 관계를 바라보는 오늘날 현대 역사학 및 철학사학계의 핵심 입장들(단절론 대 연속성론, 혹은 혁명 개념 자체의 해체론)은 사실 이미 17세기 후반 초기 근대 논쟁의 참여자들이 취했던 사유적 포지션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 그러므로 고대인과 근대인의 논쟁은 당대 역사적 행위자들의 자기 이해는 물론이고, 오늘날 연구자들이 내리는 역사학적 선택의 다채로운 단면들을 투명하게 비추어주는 지극히 특권적인 역사적 순간(privileged historical moment)이라고 할 수 있다.
9. Astrology, Natural Magic,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9.1. 마술과 과학 혁명의 역사학(Historiography of Magic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9.1.1. ‘예이츠 테제’와 그 비판
- 예이츠 테제(Yates thesis)의 대두
-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마술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프랜시스 예이츠(Frances Yates)의 가설이 지배적이었다.
- 이 테제는 신플라톤주의(Neoplatonic) 철학과 기독교 카발라(Christian cabala)가 융합된 르네상스 마술의 ‘헤르메스주의 전통’(Hermetic Tradition)이 자연 세계에 작용하려는 의지와 수학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여 17세기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 역사학적 비판: 로버트 웨스트맨(Robert Westman), 제임스 맥과이어(James McGuire), 메리 헤세(Mary Hesse), 에드워드 그랜트(Edward Grant) 등 과학사학자들은 예이츠 테제에 대해 매우 효과적인 비판을 제기했다.
- 그 결과 1997년 존 헨리(John Henry)는 앨런 데버스(Allen Debus)나 피오 라탄시(Pio Rattansi) 같은 옹호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헤르메스주의 전통의 영향력이 크게 과장되었다는 점에 학계의 보편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했다.
- 이집트학자 플로리안 에벨링(Florian Ebeling) 역시 헤르메스주의의 종교적 지향성과 상징주의적 기호학이 현대 자연과학의 인식론적 토대가 되는 것을 가로막았다고 인정했다.
9.1.2. 브라이언 비커스의 상호 배제론
- 오컬트와 과학의 이분법
- 예이츠의 가장 철저한 비판자 중 한 명인 브라이언 비커스(Brian Vickers)는 1984년 오컬트(occult)와 과학(scientific) 사이에 완전한 비동일성이 존재함을 주장했다.
- 비커스는 오컬트가 비오컬트 과학과 병행하여 널리 확산된 영향력을 가졌음은 인정하면서도, 두 전통이 서로를 배제하는 별개의 정신세계(mentalities)라고 보았다.
- ‘양서류적 인간’ 개념
- 비커스는 많은 비오컬트 사상가들이 오컬트적 신념과 사고 습관을 유지한 모순을 ‘양서류적 본성’(amphibious nature)으로 설명했다.
- 즉, 이들이 두 개의 분리된 사유 세계에 동시에 거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17세기 사상이 호환 불가능한 것들의 공존이라는 ‘혼종적 특성’(hybrid nature)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 비커스는 르네상스 오컬트 과학이 새로운 과학의 아이디어, 이론, 기술을 생산했다는 주장을 오류로 규정하며, 오컬트 전통 연구는 외계 문화를 연구하는 것과 같은 인류학적 관심에 그친다고 결론지었다.
9.1.3. 새로운 대안의 필요성
- 저자 스티븐 클루카스(Stephen Clucas)는 예이츠 테제와 비커스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설 것을 제안한다.
- 16-17세기 사상가들을 단순한 ‘양서류’나 ‘혼종’으로 범주화하는 대신, 니콜라스 H. 클룰리(Nicholas H. Clulee)와 존 헨리(John Henry)의 제안을 따라 중세로부터 17세기까지 이어진 오컬트 전통의 한 줄기인 ‘방사 이론’(radiation theory)을 추적함으로써 두 전통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를 증명하고자 한다.
- 이 접근법은 방사성 힘(radiative virtue) 이론이 후기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에 반대하고 원자론(atomism)과 기계론(mechanism)을 수용하는 자연철학적 구상(initiative)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9.2. 방사 활동과 물리 현상의 설명(Radial Activity and Explanations of Physical Phenomena)
9.2.1. 알킨디의 방사 이론과 마술의 물리학
- 존 디와 원근법 전통
- 클룰리는 1550년대와 1560년대 초반 존 디(John Dee)의 학문적 경력에서 13세기 원근법(perspectiva) 전통에서 유래한 방사성 힘 이론이 중요했음을 밝혀내며, 그를 헤르메스주의 마술사로만 보던 기존 시각을 교정했다.
- 이 전통의 기원은 9세기 아랍 철학자 아부 유수프 야쿠브 이븐 이스하크 아스사바 알킨디(Abu Yūsuf Yaʻqūb ibn ‘Ishaq aş-Şabbah al-Kindī)로 거슬러 올라간다.
- 『별의 광선에 관하여』(De radiis stellarum)
-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사이에 라틴 서방 세계로 번역된 알킨디의 저작 『별의 광선에 관하여 혹은 마술의 이론』(De radiis stellarum seu theorica artium magicarum)은 라틴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 이 저작은 천체 영향력의 전파를 다룬 점성술적 논박이지만, 알킨디는 이 광선 이론을 월하계(sublunar realm)의 자연물로 확장했다.
- 만물의 광선 방사
- 알킨디에 따르면 원소 세계는 성좌 세계의 모사(exemplum)이므로, 원소 세계의 실체적이거나 우연적인 모든 사물은 별과 마찬가지로 사방으로 광선을 방사한다.
- 이 광선들은 서로 호혜적으로 작용하며(reciprocally on one another), 피동체(patient)의 물질적 종류와 거리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낳는다.
- 마술적 부적(talismans)은 이러한 광선을 활용하여 효과를 발휘한다.
9.2.2. 인간 정신과 언어의 방사력
- 상상력적 영(spiritus maginarus)
- 인간의 마음 역시 외계의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광선을 방사한다.
- 상상력적 영 속에서 물질적 사물을 상상할 때, 그 형상(species)들이 신체적 존재성을 획득하고 광선을 발하여 외부 사물을 움직이게 된다.
- 이때 물리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은 확신, 즉 신앙(fides)이며, 신앙은 욕망의 힘(robur)이자 지지대(fulcimen)가 된다.
- 말(words)의 물리적 작용
- 정신 속의 구상은 수작업이나 언어를 통해 실현된다.
- 신이나 영에게 기도할 때 발생하는 언어의 소리는 물질적 사물과 동일하게 광선을 방사하여 원소 세계에 작용한다.
- 특히 신을 지칭하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이름들은 고유한 광선을 통해 물질을 변형시키며, 발화자의 지성보다 더 효과적으로 운동을 유발한다.
- 알킨디는 욕망, 신앙, 성공의 희망이 존재한다면 발화자가 신을 믿지 않더라도 주문과 기도가 물리적 효과를 거둔다고 보았다.
- 결론적 의의
- 알킨디의 논지는 자연 마술뿐 아니라 주문, 부적, 동물 희생 제사까지 설명하는 ‘마술의 물리적 이론’(physical theory of magic)을 제공한다.
- 이는 천체 영향력이라는 점성술적 이론을 월하계 전반의 물리적 메커니즘으로 확장한 것이다.
9.3. 원근법 전통과 곱하기 개념(The Perspectiva Tradition and the ‘Multiplication of Species’)
9.3.1. 로버트 그로스테스트와 빛의 형이상학
- 빛의 으뜸적 형상(Lux as first corporeal form)
- 13세기 옥스퍼드 학파의 로버트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는 알킨디의 방사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 세계관과 결합했다.
- 그는 빛(lux)을 물질 세계의 최초의 신체적 형상으로 보았으며, 빛이 스스로를 무한히 곱하며(multiplying itself) 중심에서 사방으로 구형으로 확산함으로써 물질과 공간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 보편적 작용으로서의 방사
- 그로스테스트에게 모든 자연적 동인(natural agent)은 자신의 힘(virtus)을 자신으로부터 피동체로 방사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 이러한 힘의 방사선은 기하학적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자연철학자는 선, 각도, 도형을 활용한 기하학(geometry)을 통해서만 자연의 작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9.3.2. 로저 베이컨과 ‘형상의 곱하기’(Multiplication of Species)
- 형상(Species)의 정의
-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그로스테스트의 직계 후계자로서 이 이론을 더욱 체계화하여 ‘형상의 곱하기’(multiplication of species) 이론을 확립했다.
- 여기서 ‘형상’이란 시각적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고, 동인이 피동체에 가하는 모든 자연적 작용(action of nature), 즉 열, 빛, 소리, 그리고 오컬트적 능력(occult virtue)을 포함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 매질을 통한 연속적 전파
- 베이컨은 동인의 힘이 공간을 통해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질(medium)의 첫 번째 부분에 형상을 부여하고, 그것이 다시 다음 부분으로 형상을 밀어내는 연속적인 물리적 ‘곱하기’ 과정을 통해 전파된다고 설명했다.
- 마술과 원근법의 통합
- 베이컨은 알킨디와 마찬가지로 이 원근법적(perspectival) 메커니즘을 마술적 현상에 적용했다.
- 부적, 주문, 인간의 상상력이 발휘하는 매혹(fascination) 등은 초자연적이거나 악마적인 힘이 아니라, 매질을 통해 기하학적으로 전파되는 물리적 광선(radii)의 작용으로 설명된다.
- 이로써 베이컨은 기적이나 악마의 소행으로 치부되던 오컬트 현상을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자연철학의 영역으로 포섭했다.
9.4. 르네상스 자연 마술로의 이행(The Transition to Renaissance Natural Magic)
9.4.1.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우주적 영
- 『인생에 관하여』(De vita libri tres)
- 15세기 후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는 르네상스 자연 마술(Natural Magic)의 토대를 놓았다.
- 그는 알킨디와 베이컨의 기하학적 방사 이론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의학적·수렴적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 우주적 영(Spiritus mundi)
- 피치노는 천체(별과 행성)의 오컬트적 능력이 우주 전체에 가득 찬 미세한 물질인 ‘우주적 영’을 통해 인간과 월하계의 사물로 유입된다고 보았다.
- 인간의 정신적 영(spiritus)이 천체의 광선과 일치할 때, 행성의 특정한 힘(예: 태양의 생명력, 목성의 지혜)을 흡수할 수 있다.
- 피치노의 마술은 이 광선들을 부적, 음악, 약제를 통해 물리적으로 ‘여과’하고 ‘포착’하는 기술이었다.
9.4.2.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자연의 결합
- 자연의 보조자로서의 마술사
-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는 마술을 악마적 마술(goetia)과 자연 마술(magia naturalis)로 엄격히 구분했다.
- 그에게 자연 마술은 “자연철학의 정점(apex)“이자 완성이었다.
- 상하세계의 혼인(Marrying the world)
- 피코는 우주를 상호 연결된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으며, 마술사의 역할은 천체의 방사적 힘과 지상의 수동적 물질을 적절하게 결합하는 것(activa passivis coniungere)이라고 정의했다.
- 이는 중세의 방사 이론이 르네상스에 이르러 인간이 자연을 적극적으로 조작하고 운영하려는 ‘운영적 의지(will to operate)’로 변모했음을 보여 준다.
9.5. 존 디와 방사적 힘의 기하학적 운용(John Dee on Radiative Virtue)
9.5.1. 『서론적 아포리즘』(Propaedeumata aphoristica, 1558)
- 중세 원근법의 요약
- 영국 수사학자이자 수학자인 존 디(John Dee)는 알킨디(Al-Kindī), 로버트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의 중세 사본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방사 이론을 계승하여 복합적인 천체 마술 체계를 구축했다.
- 그의 저작 『서론적 아포리즘』은 천체의 능력이 전파되는 기하학적 모델을 집약한 일종의 요약본적 성격을 지닌다. 디의 일차적 목표는 천체의 힘이 전파되는 방식을 수학적으로 규명하여 마술적 효과(magical effects)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9.5.2. 반사광학(Catoptrics)과 광선의 인위적 집중
- 거울을 통한 광선 증폭
- 디는 반사광학, 즉 거울(mirrors)에 대한 정교한 지식을 바탕으로 포물선형 반사경(parabolic burning mirror)이 태양광뿐 아니라 다른 행성과 별의 보이지 않는 방사선까지 초점으로 모으고, 곱하고, 물질에 각인(imprint)할 수 있다고 믿었다.
- 행성 위치의 조작
- 아포리즘 52에서 디는 반사광학에 능숙한 자는 자연 자체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별의 광선을 물질에 각인할 수 있으며, 이것이 고대 현자들의 자연철학의 핵심이었다고 선언한다.
- 나아가 아포리즘 89에서는 거울의 설계를 통해 오행성(five planets)의 천체 영향력을 굴절, 완화, 또는 증폭시킴으로써 순식간에 행성을 새로운 근지점(perigee)으로 끌어내리는 듯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이는 행성의 물리적 위치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도달하는 방사적 영향력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9.6. 방사성 힘의 물리학적 전환(The Physics of Radiated Virtue)
9.6.1. 오컬트 현상의 자연주의적 해독
- 자연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연계
- 클룰리(Nicholas H. Clulee)의 지적처럼, 방사 영향력의 물리학은 니콜라 오렘(Nicolas Oresme)이나 피에트로 폼포나치(Pietro Pomponazzi)의 자연주의적 성향과 궤를 같이하며, 오컬트 현상을 악마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아닌 ‘자연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것’으로 격상시켰다.
- 원근법 전통은 보이지 않는 능력을 비영적(non-spiritual)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부했던 물리학 영역에 수학적 처리를 확장하는 통로가 되었다.
- 의식 마술과 자연 마술의 분리
- 디가 수행한 천사 소환 같은 의식 마술(ritual magic)은 종교적 기능에 국한된 반면, 과학 혁명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헤르메스주의나 카발라와 독립된 ‘자연 마술(natural magic)‘의 지적 전통이었다.
9.6.2. 존 헨리의 마술적 기원론
- 실용적 전통과의 결합
- 존 헨리(John Henry) 역시 과학 혁명의 세계관이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과 자연 마술의 실용적·경험적 전통의 결합에서 탄생했다고 논증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오컬트 능력을 설명 불가능한 미지의 것으로 치부했으나, 자연 마술은 자석(magnetism)이나 천체 방사 같은 원격 작용을 설명 가능한 물리적 대상으로 취급했다.
- 이 과정에서 마술의 종교적·초연역적 요소가 걸러지고 자연주의적 잔재가 17세기 역학적 물질 이론(matter theory)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9.7. 월터 워너와 ‘방사성 힘’(Vis Radiativa)의 입자론적 전환
9.7.1. 노섬벌랜드 학파와 방사 전통의 수용
- 월터 워너(Walter Warner)의 위치
- 17세기 초 영국에서 토머스 해리엇(Thomas Harriot), 니콜라스 히어드(Nicholas Hill) 등과 함께 ‘노섬벌랜드 학파’를 구성했던 월터 워너는 중세의 원근법적 방사 이론을 미출간 원고를 통해 매우 독창적인 입자론적(corpuscular) 자연철학으로 발전시켰다.
- 방사성 힘(Vis radiativa)의 정의
- 워너는 우주의 물리적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방사성 힘‘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 그는 중세 베이컨 전통의 ‘형상의 곱하기’를 물리적 입자의 운동과 결합하여, 동인이 방사하는 힘을 매질을 통해 전파되는 실재적인 물리적 작용으로 재정의했다.
9.7.2. 능동적 원리로서의 방사(Radiation as an Active Principle)
- 물질과 힘의 결합
- 아리스토텔레스주의나 초기 기계론이 물질의 충돌(mechanical collision)만을 유일한 인과관계로 보았던 것과 달리, 워너는 물질 자체에 내재하거나 물질을 통해 전파되는 능동적 힘(active power)을 인정했다.
- 공간을 통한 전파 메커니즘
- 워너에게 방사성 힘은 단순히 추상적인 기하학적 선이 아니라, 물질적 동인으로부터 발산되는 미세한 입자들의 흐름이자 역동적인 파동이었다.
- 이는 자석의 끌어당김, 열의 전달, 시각 현상뿐만 아니라 천체의 영향력까지도 하나의 통일된 ‘방사 물리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이로써 오컬트 마술의 핵심 설명 모델이었던 ‘방사’는 17세기 새로운 물질 이론(matter theory)의 핵심적인 능동적 원리로 흡수되었다.
9.8. 기계론적 자연철학과 오컬트의 해체(The Dissolution of the Occult in Mechanical Philosophy)
9.8.1. 켄지름 디그비와 월터 찰턴의 기계론적 수용
- 켄지름 디그비(Kenelm Digby)의 ‘무기물 발산’(Effluvia)
- 디그비 경은 1644년 저작에서 이른바 ‘무기적 발산’(corporeal effluvia) 이론을 통해 원격 작용을 설명했다.
- 그는 자석이나 무기 분말(sympathetic powder)이 발휘하는 오컬트적 능력을, 사물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물질적 입자들의 기계적 운동과 충돌로 환원했다.
- 월터 찰턴(Walter Charlton)의 원자론적 재해석
- 피에르 가상디(Pierre Gassendi)의 원자론을 영국에 소개한 찰턴 역시 오컬트 능력을 미지의 존재로 남겨두지 않았다.
- 그는 ‘오컬트’라는 단어가 단지 ‘우리의 감각에 너무 미세하여 보이지 않는 입자의 기계적 메커니즘’을 지칭하는 명칭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마술적 현상을 완전히 자연주의적이고 역학적인 과학의 영역으로 포섭했다.
9.8.2. 아이작 뉴턴과 원격 인력(Action at a Distance)
- 기계적 충돌론의 한계 극복
- 17세기 후반 기계론적 자연철학자들이 단순한 ‘접촉 충돌’(mechanical collision)만을 우주의 유일한 인과율로 고집했을 때, 행성의 운동이나 중력 같은 원격 작용을 설명하는 데 한계에 부딪혔다.
- 마술적 대안으로서의 방사적 힘
-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광학』(Opticks)과 『프린키피아』(Principia)에서 물질 사이에 작용하는 비접촉성 힘, 즉 인력(attraction)과 척력(repulsion)을 도입했다.
- 뉴턴이 제안한 이 ‘원격 인력’ 개념은 당대 기계론자들로부터 다시 ‘오컬트 능력’을 과학에 도입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그러나 뉴턴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자연 마술 및 방사 이론(radiative force)이 보존해 온 ‘보이지 않는 능동적 힘의 전파’ 모델을 수학적으로 정밀화함으로써 과학 혁명의 최종적 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9.9. 월터 찰턴의 원자론적 방사 물리학(Walter Charleton)
9.9.1. 『반 헬몬트 번역』(1650)과 방사 활동의 정의
- 영향력적 또는 방사적 활동(Influential or Radial Activity)
- 찰턴은 1650년 얀 밥티스타 반 헬몬트(Jan Baptist van Helmont)의 자석 치료법에 관한 저작을 번역하면서, 자신의 방사 이론을 천명했다.
- 그는 자연의 무한한 저장고 안에 직접적인 신체적 접촉(immediate Corporeal Contact)이라는 둔한 조건에 구속되지 않는 동인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 그는 이를 천체가 invisible deradiations을 통해 영향력을 전달하는 방식과, 월하계의 사물들로부터 반물질적인 원자의 실(semi-material thread of Atomes) 형태로 뿜어져 나오는 imperceptible emissions 사이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영향력적 또는 방사적 활동‘이라 명명했다.
- 반 헬몬트의 ‘블라스’(Blas) 비판적 수용
- 반 헬몬트는 후기 스콜라주의자들이 원격 작용을 무시한 것을 비판하며, 천체로부터 주입된 동인인 ‘블라스(Blas)‘를 통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 반 헬몬트에게도 ‘방사적 작용’(actiones radiales)이 존재했으나, 그의 이론에서는 동인과 피동체 사이의 상호 호혜성(reciprocity)이 결여되어 있었다. 반면 찰턴은 이를 훨씬 더 정교하고 물질적인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9.9.2. 『에피쿠로스-가상디-찰턴 자연학』(Physiologia, 1654)
- 오컬트 품질의 해체
- 찰턴은 1654년 저작 『자연학』(Physiologia Epicuro-Gassendo-Charltoniana)에서 스콜라주의자들이 알 수 없는 ‘오컬트 성격’(occult qualities)으로 치부하고 포기했던 현상들을 방사 이론으로 설명했다.
- 예컨대 호박(Amber) 등 전기를 띠는 물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끈질긴 광선’(tenacious Rayes)을 카멜레온이 혀를 뻗어 곤충을 잡는 것에 비유했다.
- 그러나 이 광선들은 비물질적 형상(immaterial species)이 아니라, 미세한 입자들의 지속적인 광선인 ‘방사적 확산’(radial Diffusion)이자 ‘원자의 무리’(swarms of subtle Emanations)로 재정의되었다.
- 빛과 자력의 원자화
- Peripatetics(소요학파)의 주장과 달리, 찰턴은 빛을 단순한 성질이 아니라 ‘신체’(body)로 보았다.
- 빛의 광선은 광원으로부터 직선으로 뿜어져 나와 눈에 도달하는 화성적 입자들의 연속적인 흐름(tenuous streams of Igneous particles in a continued fluor)이다.
- 그는 Alhazen의 명제 “모든 발광점은 구형으로 방사한다(Omne punctum luminosum radiare sphaeraliter)”를 인용하며, 이 입자들이 기하학적으로(구형 및 원뿔형으로) 확산된다고 보았다.
- 자석 역시 자석의 중심에서 활동 영역의 경계(bounds of their orb of activity)까지 ‘자기 광선’(magnetique Rayes)을 발산하며, 이 광선들은 빛의 광선처럼 후행 입자가 선행 입자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tense and direct하게 전진한다고 설명했다.
9.10. 케넬름 디그비의 물질적 유출론(Kenelm Digby)
9.10.1. 『신체론』(Treatise on the Nature of Bodies, 1644)
- 활동 영역(Sphere of activity)의 보편화
- 디그비는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의 연구를 따라 자석이 유출물(emanations)로 구성된 ‘활동의 영역’ 혹은 ‘작용의 구체’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나아가 디그비는 이러한 자기적 구체가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물리적 신체(every physicall body)가 필연적으로 가지는 보편적 법칙, 즉 ‘유출물의 궤도(orbe of fluours)‘라고 주장했다.
- 의도적 형상(Intentional species)의 거부
- 디그비는 감각에 미치는 인상이 ‘영적이거나 영과 같은 사물 혹은 성질’, 즉 ‘의도적 형상’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가르치는 전통적 관점들을 강력히 비판했다.
- 그는 그러한 비물질적 존재를 증명하는 것보다, 자신이 제안한 ‘물질적 작용(materiall actions)’만으로도 충분히 그 효과들을 수행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자연철학의 과제라고 보았다.
- 디그비에게 빛을 포함한 모든 방사적 힘은 철저히 신체적(corporeal)이었다.
9.10.2. 불(Fire)의 모델과 중력으로의 확장
- 방사성 운동의 메커니즘
- 디그비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활동의 영역’을 불의 작용 방식을 통해 설명했다.
- 불의 원천(center)으로부터 불꽃과 빛이 사방으로 직선으로 확산되어 거대한 구체를 형성하는 메커니즘이 곧 모든 신체적 동인의 활동 영역이다.
- 불의 운동은 중심에서 원주로 향하는 직선상의 흐름(fluxe in a direct line)이다.
- 중력(Gravity)의 설명 모델
- 디그비는 자신의 중력 이론 역시 불의 무한한 증식과 희박화(extreme multiplication and rarefaction)를 통한 구형 확장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 디그비와 찰턴에게 원근법 전통에서 차용한 방사 개념은 스콜라주의의 추상적 관념인 ‘형상과 결여(formes and priuations)’나 리차드 스와인즈헤드(Richard Swineshead)의 ‘형상의 강도와 약화(intensio et remissio formarum)’ 같은 성질론적 도메인을 대체하는 강력한 인과적 메커니즘(explanatory lacuna)을 제공했다.
9.11. 아이작 뉴턴과 방사 전통의 유산(Isaac Newton)
- 비접촉적 상호작용의 가능성
- 방사 이론의 역사는 17세기로 끝나지 않았다. 이 전통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직접적인 접촉과 충돌 없이 일어나는 원격 작용, 즉 중력(gravitational force)의 메커니즘을 구상하는 데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 『광학』(Opticks)의 쿼리(Queries)
- 뉴턴은 중력의 원인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광학』 부록에 수록된 사유들은 그가 물리적 인과관계를 방사적(radiative)인 것으로 고려했음을 보여 준다.
- 쿼리 29(Query 29)
- 투명한 물질(Pellucid Substances)이 빛의 광선을 굴절·반사·회절시키며 거리를 두고 작용하고, 광선 역시 그 물질들을 가열하기 위해 원격으로 자극하는 작용과 반작용(Action and Re-action at a distance)이 사물 간의 인력과 매우 닮아 있다고 유추했다.
- 쿼리 31(Query 31)
- 월터 워너(Walter Warner)가 입자론적 맥락에서 ‘방사성 힘’(vis radiativa)을 사용한 것과 유사하게, 뉴턴은 “사물의 미세한 입자들이 빛의 광선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작용하여 자연 현상의 상당 부분을 생산하는 어떤 권능, 힘, 혹은 작용(Powers, Virtues, or Forces)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 방사 전통의 존재 덕분에 뉴턴은 모든 물리적 상호작용을 단순한 역학적 충돌과 압착으로 환원하려는 당대 기계론자들의 압박에 저항할 수 있었다.
9.12. 결론(Conclusion)
- 과학 혁명과 자연 마술의 필연적 관계
- 본 글이 입증하고자 한 바는 오컬트 전통의 일부분(방사 이론)이 과학 혁명과 깊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 이론은 의식 마술이나 헤르메스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비록 천상과 지상의 조화라는 마술적 전제에서 출발했으나 철저히 ‘물리적인 마술 이론‘이었다.
- 오컬트의 과학화
- 알킨디가 천체 영향력을 월하계로 확장한 이래, 자연 마술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였던 오컬트 성질을 합리적이고 설명 가능한 물리적 대상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17세기 후반 기계론자들이 단순한 역학적 충돌 모델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자연 마술이 보존해 온 ‘방사적 힘(radiative force)‘의 유산은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적 개념을 공급했다.
- 따라서 과학 혁명의 철학적 토대를 온전히 확립하기 위해서는 점성술과 자연 마술을 포함한 ‘오컬트 과학’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10. Practitioners’ Knowledge
10.1. 사학사(Historiography): 이론과 실제, 예술과 자연
- 실천가 지식의 학술적 위상과 쟁점
- 근세 초기 장인과 공예가들의 지식 상태는 ‘실천가의 지식(practitioners’ knowledge)‘이라는 용어로 포섭되며, 이는 철학사 및 과학사 학계에서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 최근 사학사에서는 실천가들이 근대 과학의 출현에 미친 영향의 정도를 두고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본질 및 이론과 실제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에 따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 지적 역사 중심주의(주류 진영)의 입장
- 많은 학자들은 과학사가 주로 이론적 과학에 관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의 영역에 속한다는 관점을 지지한다.
- 이들은 근세의 장인과 실천가들이 대체로 문맹이었기 때문에, 주로 17세기에 일어난 사건들로 규정되는 과학 혁명과는 무관하거나 기껏해야 부수적인 관계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 실천가 중심주의(대안 진영)의 입장
- 반면 이론과 더불어 과학의 실험적 측면이 반드시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고 도전하는 학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 일부 저자들은 장인과 실천가들이 실험 과학의 출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시각은 중세와의 연속성을 시사하며 과학사의 학술적 범위를 확장하도록 요구한다.
- 더불어 실천가의 지식과 이론적 지식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가 존재하는지, 혹은 과학 연구를 명제 기반의 전통적 지식 이해 대신 ‘인식적 활동(epistemic activities)‘과 ‘실천의 체계(systems of practice)‘라는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10.2. 초기 사학사에서의 논쟁과 발전 (19세기~20세기 중반)
-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의 배제론
- 19세기의 영국 석학이자 ‘과학자(scientist)’라는 용어를 고안한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은 공예 실천가와 장인들이 과학사에 무관하다는 관점을 옹호한 초기 인물이다.
- 휴얼은 웅장한 시각 예술품이나 거대한 성당을 건축한 중세의 “거장 예술가들”의 작업이 과학의 발전을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에 포함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 그는 이들이 원리의 실용적 가정을 바탕으로 역학이나 기하학에 대한 기능적 지식을 가졌을 수는 있으나, “사유적 지식(speculative knowledge)”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과학에 기여할 수 없었다고 추론했다.
- 에드가 질셀(Edgar Zilsel)과 마르크스주의 사학
- 20세기 초 과학사가 정식 학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장인의 영향력에 대해 완전히 반대되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 일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장인이 근대 과학의 발흥에 핵심적이었다고 주장했다.
- 이들 중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역사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드가 질셀(Edgar Zilsel)이 특히 주목받는다.
- 질셀은 1941년 논문에서 근세 과학 현상이 기술의 발전과 정량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변화로 특징지어지는 ‘사회학적 과정(sociological process)’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고 주장했다.
- 그는 대학 학자나 휴머니스트와 구별되는 “우수한 육체 노동자” 집단(예술가-엔지니어, 외과의, 항해 및 악기 제조자, 측량사, 항해사, 포수 등)이 실험과 정량화 방법을 개발했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고 채택되면서 16세기에 “과학이 탄생했다”고 선언했다.
- 기술, 상업 및 사회경제적 요인의 강조
- 레이어 호이카스(Reijer Hooykaas)는 르네상스 시기 시민 계급의 해방이 육체 노동의 위상을 높이고 장인과 학자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여, 실험 방법의 빠른 발전과 정교화를 이끌었다고 보았다.
- 로버트 K. 머턴(Robert K. Merton)은 그의 저서 《17세기 영국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에서 해상 운송, 항해, 광업, 야금술, 군사 기술, 섬유 생산, 농업 등에서의 사회경제적·공리적 요인을 강조하며 근세 과학 발전에 결정적이었던 문화적 가치들을 추적했다.
- 찰스 웹스터(Charles Webster)의 《위대한 부흥》 역시 영국의 기술 발전에 주목하며, 17세기의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개혁 속에서 의학과 실용적·공리적 관심을 강조한 경험적·실험적 자연철학의 역사를 조명했다.
10.3. 내부주의(Internalist) 전통의 반발
- 알렉상드르 코이레(Alexandre Koyré)의 이론적 연역주의
- 앵글로-아메리칸 전통의 많은 과학사학자와 철학자들은 공예 및 예술적 지식에 대한 강조를 거부하고 휴얼의 노선을 따랐다.
- 알렉상드르 코이레(Alexandre Koyré)는 이 방면에서 매우 영향력이 컸으며, 이론과 실제를 엄격히 구분했다.
-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가 낙체 과학에 도달한 것이 실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철학적 연역을 통해서였다고 주장했다.
- A. 루퍼트 홀(A. Rupert Hall)의 위계적 구조론
- 내부주의 전통의 또 다른 인물인 A. 루퍼트 홀(A. Rupert Hall)은 학자와 장인 사이에 위계적 관계를 상정했다.
- 그에 따르면 장인은 학자들이 과학 혁명의 핵심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필요한 “원자재(raw material)”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 홀은 수리물리학자들의 위대한 발견이 실용 엔지니어나 장인들의 머리 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완전히 무용했다고 단언했다.
- H. 플로리스 코엔(H. Floris Cohen)과 토머스 쿤(Thomas Kuhn)의 주변화
- H. 플로리스 코엔(H. Floris Cohen)은 코이레와 홀을 인용하며 예술, 공예, 기술적 진보가 근세 과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나, 이는 단지 철학자와 학자들에게 “생각할 거리(food for thought)”를 제공한 것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 즉, 장인의 작업이 과학 혁명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그 혁명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입장이다.
- 토머스 쿤(Thomas Kuhn) 역시 수리적 전통과 실험적 전통을 날카롭게 구별하면서, 장인의 실천과 베이컨주의적 실험주의를 포함하는 실험적 전통은 전통적인 준-수학적 분야에서의 “아이디어의 혁명”이라는 핵심 발전과 부수적인 관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10.4. 구성주의적 전환(Constructivist Turn)과 현대 사학 연구
- 지식 생산에 대한 새로운 접근
- 20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일단의 학자들이 지배적이었던 내부주의적 과학 혁명 이해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 이는 과학적 지식이 이론과 아이디어의 단순한 진보가 아니라 인간 문화에 의해 생산된다고 보는 구성주의 사학(constructivist historiography)으로의 거대한 전환과 맞물려 있다.
- 학자들은 중세와 근세 초기 사이의 명백한 연속성을 지적했으며, 유럽의 위대한 남성들의 아이디어 역사에만 기반한 단일한(monolith) 과학 개념을 문제 삼았다.
- 이를 통해 과학사의 범위는 광범위하게 확장되었으며, 장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의사과학(pseudoscience)으로 치부되었던 연금술(alchemy)과 점성술(astrology) 같은 분야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 실천, 물질성, 그리고 보이지 않는 행위자들
- 구성주의적 접근은 실천(practice), 물질성(materiality), 사회문화적 협상을 과학 발전 이해의 필수 핵심으로 부각시켰다.
- 이에 따라 과학에 필수적이었던 아카이빙 및 수집 실천, 자연 지식 생산에 참여한 근세 산파와 여성들의 기여, 그리고 실험실이나 작업장에서 학자들에게 고용되거나 기술을 탈취당한 채 잊혀진 다양한 “보이지 않는 기술자들(invisible technicians)”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 아울러 글로벌 관점을 지향하면서 상품의 상업적 무역, 정보 교환 방식, 과학과 행정 국가의 관계, 시각 및 물질문화의 생산과 전파 등으로 관심이 확대되었다.
- 현대 사학자들의 경험 연구와 저작
- 파올로 로시(Paolo Rossi)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게 영향을 준 영국의 예술가와 실천가들에 주목하며, 이들이 기계적 장치와 같은 객체를 제작하는 방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적 인과율 이해와는 다른 형태의 지식 가치를 과학 실천에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 제임스 베넷(James Bennett)은 실용 수학과 기구 제작자(instrument builders)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에릭 애시(Eric Ash)는 “전문 매개자(expert mediators)”들이 구리 광산, 항해, 항구 건설 등의 기술적 지식을 통해 국가 건설 과정에서 어떻게 도구적 역할을 했는지 탐구했다.
- 데보라 하크니스(Deborah Harkness)는 《엘리자베스 시대 런던과 과학 혁명》에서 연금술사, 장인, 상인, 의료 실천가, 기구 제작자 등이 공유한 “토착 과학(vernacular science)”을 로컬 중심의 민족지학적 접근으로 조명했다.
- 윌리엄 이몬(William Eamon)은 알레시오 피에몬테세(Alessio Piemontese)의 《비법들(Secreti)》과 같은 “비법서(books of secrets)”에 기록된 장인과 공예의 기밀 전수 방식을 분석했으며, 다수의 학자가 가사 과학 및 의학의 레시피 문헌을 연구했다.
10.5. 파멜라 롱과 파멜라 스미스의 장인 인식론
- 파멜라 롱(Pamela O. Long)의 기술 문헌 및 교역 지대 연구
- 파멜라 롱은 저서 《개방성, 비밀주의, 저자권》에서 다양한 기술 논문들을 분석하여 기계적 기술에 대한 저술이 어떻게 근세 과학의 필수 구성 요소가 되었는지 실증했다.
- 또한 《장인/실천가와 새로운 과학의 발흥》에서 피터 갈리슨(Peter Galison)의 ‘교역 지대(trading zones)’ 개념을 빌려와 학자와 장인 사이에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교환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 롱은 현대적 개념의 ‘학자’와 ‘장인’이라는 이분법이 근세의 복잡한 사회문화적 상호작용을 포착하는 데 부적합하다고 지적하며, ‘기술(art)’과 ‘자연(nature)’의 관계 변화를 추적했다.
- 중세 후기에 기술은 자연의 열등한 모방(mimesis)에서 자연의 완성 또는 보완으로 개념이 변화하며 위상이 높아졌고, 연금술과 사치품 수요 확대를 거쳐 15~16세기에는 자연을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다는 광범위한 운동으로 이어졌다.
- 파멜라 스미스(Pamela H. Smith)의 장인 인식론(Artisanal Epistemology)
- 파멜라 스미스는 《장인의 신체》에서 근세 장인들이 실천을 중심으로 자연 세계를 사유하고 관여하는 방식을 개발했으며, 이것이 새로운 실험 철학의 부상과 제도화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논증했다.
- 스미스는 이를 ‘장인 인식론(artisanal epistemology)‘으로 명명하고, “물질과 자연은 살아 있으며 인간의 신체와 시너지를 이루며 존재한다는 관점과 연결된 신체적 형태의 인지(bodily form of cognition)“라고 정의했다.
- 이 인식론은 텍스트보다는 주로 사물의 생산을 통해 표현되었으며, 고대의 권위가 아닌 물질과의 신체적 교전 및 고투에서 비롯된 ‘경험(experience)’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 스미스는 이러한 역사적 실험과 레시피를 재현하는 학술 방법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만들기와 알기 프로젝트(The Making and Knowing Project)‘를 조직하여 중세 프랑스어 비법서 manuscript(BnF Ms. Fr. 640)의 디지털 비평판 제작 및 역사적 복원 연구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인류학과 신체 인지 철학의 논의를 수용하여 이론과 실제의 간극을 좁히고자 시도했다.
10.6. 테크네(Techne), 에피스테메(Episteme), 그리고 육체 노동의 철학사
- 고대 그리스의 지식 위계와 아리스토텔레스
- 근세 유럽의 장인 지식은 고대 철학적 맥락을 고려하며 진화했다. 고대 그리스 이후 철학자들은 인간의 지식을 분류하고 위계를 설정했다.
- 특히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를 따라, 철학자들은 실용적 지식인 ‘테크네(techne)’를 이론적·철학적 지식인 ‘에피스테메(episteme)’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했다.
- 테크네는 사물을 만들거나 효과를 생산하는 지식으로 주로 장인의 영역이었으며, 이성이 아닌 물리 세계의 감각을 통해 획득되므로 근본적 진리를 밝히기에는 너무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 반면 에피스테메는 연역과 논리적 추론(수학이 대표적)을 통해 얻어지며 가장 확실하고 우연성이 적은 지식으로 숭상되었다.
- 따라서 육체 노동과 공예는 확실한 철학적 지식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작업은 노예의 영역으로 전락한 반면 여가를 누리는 자유인 철학자들은 높은 사회적·지적 위상을 누렸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Politics)》에서 장인의 삶이 고결하지 못하고 탁월함에 적대적이므로 시민들이 이러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직설적으로 서술했다.
- 로마 시대와 초기 기독교의 부정적 노동관
- 이러한 위계는 스토아학파(Stoics) 학자들에게도 수용되었다.
- 세네카(Seneca)는 지혜에 대한 탐구 외의 모든 추구를 보잘것없고 유치한 것으로 보았으며, 키케로(Cicero)는 《의무론(De officiis)》 또는 관련 저작(De finibus)에서 임금을 받기 위해 육체 노동을 하는 자들을 노예와 같다고 보며 공예와 육체 노동을 비천하고 비자유적(illiberal)인 것으로 치부했다.
- 로마인들은 실용 예술을 ‘비자유 예술(artes illiberales)’ 또는 ‘속된 예술(artes vulgares)‘로 낙인찍었다.
- 기독교의 부흥과 함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아 농업 노동이 죄에 대한 고통스러운 형벌이라는 관점이 생겨났다.
-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는 노동을 신성한 추구로부터의 방해로 묘사하기도 했으나, 중세 수도원 운동(베네딕토회 등)은 나태를 방지하고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참회의 수단으로 노동을 간주하여 작물 수확, 필사, 의약품 생산 등의 육체 노동을 수행했다.
10.7. 기계적 예술(Artes Mechanicae)의 격상과 중세의 변화
- 기계적 예술의 분류와 철학적 편입
- 9세기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n Scotus Eriugena)는 ‘자유 예술(artes liberales)’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7가지 육체 노동을 ‘기계적 예술(artes mechanicae)‘이라는 용어로 지칭했으나, 이는 신성하기보다는 지상에 치우친 지식으로 구별되었다.
- 12세기 성 빅토르의 위고(Hugh of Saint Victor)는 저서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을 통해 직물 제조, 군비, 상업, 농업, 사냥, 의학, 연극의 7가지 구체적인 기계적 예술을 정의했다.
- 위고는 군비의 범주에 건축, 목공, 금속 가공을 포함하는 등 이를 넓은 의미로 파악했으며, 수리 수학보다는 수공예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기계적 예술의 위상을 높여 철학의 4대 주요 분과 중 하나로 분류했다.
- 아랍 학술 문헌의 유입과 경험의 부각
- 13세기부터 아랍어 번역 문헌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장인의 노동과 기구 제작을 철학과 호환 가능한 지식으로 우대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 실용 수학, 중량 학문(science of weights), 그리고 양수기나 광학 장치, 악기 등을 아우르는 기계 학문(science of machines)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실용 기하학을 농업, 무기 제조, 계량학 등으로 세분화했으며, 머리와 손의 작업을 밀접하게 결합한 아랍 연금술의 영향을 받았다.
- 자비르 이븐 하얀(Jabir ibn Hayyan)이나 알라지(Al-Rāzī)의 라틴어 번역 문헌들은 증류와 원소 변형 같은 연금술적 조작 기술뿐만 아니라 물질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사유도 내포하고 있었다.
- 다만 이러한 재분류와 연금술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중세 대학의 커리큘럼은 여전히 자유 예술에 집중되어 장인의 지식이 제도권 내부로 전면 진입하지는 못했다.
10.8. 르네상스기 장인 지식의 부상과 지식의 부호화
- 기술 논문과 비법서의 확산
- 중세 말과 르네상스 초기에 이르러 실용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의 간극이 대폭 좁혀졌다.
- 14~15세기부터 장인과 학자들이 실용적 주제를 기술 논문(technological treatises)으로 부호화하기 시작했다.
- 의사 출신의 독일 군사 엔지니어 콘라트 키에제르(Konrad Kyeser)는 대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공성 병기, 로켓, 화기 등을 도해한 라틴어 시문 논문 《벨리포르티스(Bellifortis, c. 1405)》를 저술했다.
- 베네치아 해군에서 평선원에서 사령관 및 항해사(armiraio)까지 진급한 미켈레 다 리오도(Michalli da Ruodo)는 정규 문해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상업 수학, 조선술, 자전적 항해 기록을 담은 방대한 manuscript를 남겼다.
- 15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 장인의 공예 지식과 관련된 실용적 기술을 담은 이른바 ‘비법서(books of secrets)‘가 인쇄되어 대량으로 유포되었으며, 농업, 요리, 의학 레시피, 가사 경제학 manual이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 인문주의자들과 실천가들의 상호작용
-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사치품과 예술품에 대한 상업적 수요가 폭증하면서 실천 활동의 밀도가 극대화되었고, 지식의 체계적 기호화가 가속화되었다.
- 15세기 인문주의자 니콜라우스 크랍스(Nicholas of Cusa)는 전통적 학문이 아닌 사물 자체로부터 신의 창조 지식을 얻는 문맹의 ‘이디오타(idiotae, 보통 사람)‘들을 찬양했다.
-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의 원근법 작업에 매료되어 저서 《회화론(Della pittura, 1435)》을 그에게 헌정하고 전문가적 수정을 요청했다.
- 알베르티는 회화를 기하학과 결합함으로써 조각, 건축과 더불어 회화의 위상을 자유 예술의 수준으로 격상시키고자 했으며, 학자적 인문주의와 장인적 실천을 스스로 겸비했다.
10.9. 광업, 야금술, 그리고 파라셀수스의 의료 화학 혁명
- 실용 경험의 텍스트화
- 16세기 중반, 학문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실용 지식을 소홀히 다룬 것에 대한 반발이 장인과 학자 양측에서 제기되었다. 광업과 야금술이 이러한 반성의 토대가 되었다.
- 광산 엔지니어 반노초 비링구초(Vannoccio Biringuccio)는 이탈리아어로 《피로테크니아(De la pirotechnia, 1540)》를 저술하여 금속 추출, 대포 제조, 화약 제조 등 당대 기술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 직후 인문주의 학자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Georg Agricola)는 지식인 독자층을 위해 광업과 야금술을 총망라한 라틴어 대작 《광산물에 대하여(De re metallica, 1556)》를 출간했다.
- 파라셀수스(Paracelsus)의 도발과 스파기리아(Spagyria)
- 의사 테오프라스트 파라셀수스 폰 호엔하임(Theophrastus Paracelsus von Hohenheim)은 대학의 스콜라 자연철학 및 갈레노스 의학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했으며, 그 무기로 장인의 실용 지식을 선택했다.
- 그는 종이 위의 학문이 게으른 자들을 양산한다고 비판하며 직접적인 ‘경험’과 ‘여행’을 강조했고, 광부, 농부, 장인들의 경험과 레시피를 수용했다.
- 그는 자연물을 불로 분석하여 성분으로 분리하는 ‘화학적 해체(Scheidung)’를 철학의 기초로 삼았다.
- 이에 기반하여 만물이 유황(sulfur), 수은(mercury)뿐만 아니라 ‘소금(salt)‘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3원리론(tria prima)‘을 제창했다.
- 복합체를 분리하여 독성을 정제하고 재조합하여 정화된 본질을 얻는 이 연금술적-의학적 체계를 ‘스파기리아(spagyria)‘라 불렀으며, 대학의 전통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는 강력한 사상적 동력으로 작용했다.
- 실천 우선론의 확산
- 금세공사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는 저서 《금세공술에 대하여(Dell’oreficeria, 1568)》에서 실천이 언제나 이론에 선행하며 이론의 규칙은 사후에 실천에 접목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 프랑스의 도예가 베르나르 팔리시(Bernard Palissy) 역시 《물의 자연에 대한 경이로운 담론(1580)》에서 ‘실천’과 ‘이론’의 대화 구도를 통해 실천의 완승을 선언했으며, 하늘과 땅이라는 자연의 아름다운 책을 읽는 ‘노동자의 철학’을 옹호하며 이론을 실천의 하위 개념으로 재정립했다.
10.10. 비트루비우스적 장인(Vitruvian Artisans)과 실용 수학의 전개
- 교역 지대(Trading Zones)로서의 건축 프로젝트
- 롱이 지적한 바와 같이 무기고, 광산, 건축 현장 등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교역 지대’가 활성화되었다.
- 특히 르네상스 건축 프로젝트는 장인, 건축가, 기술자, 인문주의자, 수학자가 밀접하게 조우하는 공간이었다.
- 중세의 마스터 석공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예술가와 ‘건축가(architect)’라는 정체성이 부상했다.
- 건축가들은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 《건축론(De architectura)》을 재발굴했다.
- 인문주의 학자 다니엘레 바르바로(Daniele Barbaro)는 석공 도제 출신의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와 협력하여 1556년 비트루비우스 주해판을 발간했으며, 팔라디오의 현장 지식과 자재에 대한 이해가 이 텍스트에 긴밀히 통합되었다.
- 원근법을 활용한 새로운 도면 작도법, 수리 기하학 기법, 전란으로 인한 군사 건축(요새화 및 측량술)의 팽창은 건축가의 전문 범주를 대폭 확장시켰다.
- 화가이자 군사 엔지니어였던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Francesco di Giorgio)가 남긴 《건축, 공학 및 군사 예술 논고(Trattato di architettura, ingegneria e arte militare)》는 전반부의 기계·장치 도해와 후반부의 인문주의적 이론 사유를 동시에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 수학적 실천가와 국가 권력
- ‘비트루비우스적 장인’들은 다재다능한 ‘석학(polymath)’의 이상을 구현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기하학적 증명과 경험의 시험이 과학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 카를 5세의 시계 제작자이자 자동인형 발명가인 자넬로 토리아니(Janello Torriani)는 정규 대학 교육 없이 스스로의 손과 모루 위에서 최초의 태엽 구동식 이동형 행성 시계를 제작하여 찬사를 받았다.
- 역사학자 크리스티아노 자네티(Cristiano Zanetti)는 토리아니가 의사이자 철학자인 조르조 포스둘로(Giorgio Fondulo)와 교류한 점을 들어, 장인 지식과 대학 지식이 무 자르듯 분리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 마리오 비아지올리(Mario Biagioli)에 의하면, 이탈리아 대학 내에서 기계적 예술과의 연관성 때문에 무시당하던 수학의 위상이 절대주의 국가의 부상과 군사 혁명을 거치며 1600년경 크게 격상되었다.
- 파스칼 브리오스트(Pascal Brioist) 역시 16세기 후반에는 상아탑의 상투적인 학문 지식만으로는 기하학자의 신뢰성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조정과 국가를 섬기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제의 결합이 필수적이었다고 분석했다.
- 니콜로 타르탈리아(Niccolò Tartaglia)의 《새로운 과학(La nova scientia, 1537)》은 포술(art of gunnery)을 대수학 및 아르키메데스적 추론과 결합하여 탄도학을 기하학화한 상징적 저작이다.
- 이는 전통적으로 자연철학의 영역이었던 발사체 운동 논의를 실용 수학과 경험의 권위로 전환시켰으며, 이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두 개의 새로운 과학(1638)》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 네덜란드의 Cornelis Drebbel(코르넬리스 드레벨) 또한 잠수함, 광학 기구, 화학 염료 등을 개발하며 자연철학, 연금술, 공학을 결합하여 당대에 ‘장인 철학자(artisanal philosopher)’로 칭송받은 대표적 사례이다.
10.11. 실천가들과 새로운 철학(New Philosophy)의 제도화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지식 개혁과 한계
- 장인의 실용적·유용한 지식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기획을 통해 새로운 과학의 핵심 징표로 자리 잡았다.
- 베이컨은 당대 자연철학을 무력하다고 비판하며 인류의 복지와 국가를 위한 ‘능동적 과학(active science)’을 주장했다.
- 그는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세상을 바꾼 3대 발명으로 꼽으며, 관찰과 실험을 체계화하는 학술 공동체와 제도적 지원을 요구했다.
- 그러나 베이컨은 기계적 예술의 성과를 극찬하면서도, 정작 장인과 공예가들에 대해서는 이들이 맹목적이고 이윤 지향적인 ‘경험주의자(empirics)’에 불과하여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체계화하기 어렵다고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 새로운 과학에서 지식 생산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연철학자여야 한다는 입장 수호였다.
- 그럼에도 체사레 파스토리노(Cesare Pastorino)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베이컨이 고위 관료(법무관 등)로서 다루었던 국왕의 특허권 및 기술 발명 특허 법률 문서들의 엄격한 요건들이 그의 철학 텍스트에서 실험 실천을 통제하고 검증하는 방법론적 프레임워크로 변용되었음이 밝혀졌다.
- 런던 왕립학회(Royal Society of London)의 지식 수용과 계급적 배제
- 베이컨의 비전을 실현하고자 설립된 런던 왕립학회는 장인과 경험주의자들의 정보 유용성을 인정했으나, 자신들의 신사적인 철학 탐구와 장인들의 미천한 작업을 엄격히 구별했다.
- 창립 멤버인 토머스 스프랫(Thomas Sprat) 주교는 장인의 지식이 자연철학에 유용하지만, 장인들은 이윤 추구 동기와 업무의 분주함 때문에 여유로운 철학적 성찰에 부적합하므로 왕립학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 즉, 장인의 경험적 실천은 모방과 에뮬레이션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자들에 의해 ‘전유(appropriate)’되어야 할 가공되지 않은 자원이라는 태도였다.
- 이러한 계급적 위계는 천문학자 존 플램스티드(John Flamsteed)가 기구 제작 및 기계 장치 조작에 능숙했던 실험 큐레이터 로버트 후크(Robert Hooke)를 비하하는 맥락에서 “기계 작가(Mechanick Artist)”라고 모욕한 천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 반면 후크 본인은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 1665)》 서문에서 자신의 야망은 렌즈를 깎고 갈아준 장인들이 자신에게 봉사했듯 당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에게 도구적으로 봉사하는 것이라 서술하여, 장인 실천과 과학의 긴밀한 상호 의존성을 더 개방적으로 인식했다.
10.12. 결론
- 근세 과학의 발흥 과정에서 실천가의 지식이 점한 상대적 중요성을 둘러싸고 과학사 학계 내의 다양한 의견 대립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 그러나 최근 수십 년간의 사학사적 조류는 장인 및 실용 지식을 중심 서사로 적극 수용하고 있으며, 유럽 중심적이고 위대한 남성의 아이디어에만 의존하던 전통적인 과학 혁명 내러티브의 독점력은 약화되었다.
- 글로벌 관점으로의 이동과 포스트콜로니얼 비판의 결합은 고전적인 유로센트릭 과학 발생 담론을 재고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제 과학사(history of science)를 더 포괄적인 ‘지식사(history of knowledge)’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 이 학문적 전환의 최종 성패와 무관하게, 근세 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앞으로 장인과 실천가를 포함하는 더 넓은 지식의 역사를 필수적으로 대면하고 다루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