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ambridge History of Philosophy of the Scientific Revolution Part I
Introduction: The Disciplinary Revolutions of Early Modern Philosophy and Science
1. 근세 철학 및 과학의 학문적 혁명 개요
- 유럽 지적 문화의 근본적 변화: 대략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서유럽의 지적 문화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 이 시기에는 논쟁이나 열광적인 찬성을 불러일으킨 거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미미했으나 점차 성장한 아이디어, 혹은 초기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이후 극적인 효과를 내며 분출한 아이디어들이 등장했다.
- 이러한 새로운 견해들은 결국 근세 정전(canon)을 구성하는 지적 전통으로 결합되었다.
- 지적 변혁의 두 가지 핵심: 이 시기의 수많은 변혁 중 두 가지가 핵심적이었다.
- 첫 번째는 명시적인 개혁으로, 철학자들이 선행 세대의 몰두를 제쳐두고 “기초부터 다시 올바르게 시작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 두 번째는 선언적이진 않았지만 더 심오한 변화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개정된 것이다.
- 시대 구분과 현대적 인식: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발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시대 구분에 반영하고 있다.
- ‘근세(early modern period)‘는 그 이전의 ‘후기 르네상스’와 종종 날카롭게 구분된다. 또한 근세 사상가들은 이전 시대보다 현대와 훨씬 더 많이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여겨진다.
- 역사학계의 전통적 접근
- 철학사학자들은 중세 및 르네상스의 선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스콜라 철학에서 벗어난 ‘근세 철학‘을 언급한다.
- 과학사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철학, 수학적 ‘혼합 과학’, 자연사, 의학, 연금술 등 다양한 자연 지식 영역을 오늘날 우리가 (시대착오적으로) ‘과학’이라고 부르는 현대적 융합물로 대체한 ‘과학 혁명‘을 극적으로 언급한다.
- 두 역사의 중첩과 분리
- 이러한 철학 및 과학의 변혁은 서로 겹쳐 있었으며, 르네 데카르트,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 피에르 가상디, 로버트 보일, 아이작 뉴턴 등 많은 인물들이 철학사와 과학사 모두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철학과 과학을 완전히 다른 역사학적 접근 방식을 가진 별개의 학문 분야로 분리하여 다루었다.
2. 학문적 통합을 향한 새로운 경향
- 일체화된 지적 역사
- 최근 30년 동안의 연구는 철학과 과학을 분리하던 전통적 경향에 반대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 이 새로운 관점은 근세의 지적 역사를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바라본다.
- 당대의 역사적 저자들 스스로가 철학과 과학의 구분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두 영역을 쉽게 분리할 수 없다.
- 상호 불가분의 관계
- 현대 철학의 출현과 현대 과학의 출현은 서로 분리된 현상이 아니었다.
- 그것은 동일한 시기에, 종종 동일한 저자들에 의해 쓰인 텍스트 안에서 일어난 동일한 변혁의 단면들이었다.
- 따라서 과학 혁명의 철학사는 근세 철학의 역사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분리할 수 없다.
- 방법론적 어려움의 지속
- 근세 사상의 근본적 통일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학자들은 고전적 논쟁과 전통적 설명들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방법론적인 어려움도 수반되었다. 학문적 분업의 틀은 생각보다 완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 새로운 중간 지대의 모색
- 근세 철학사학자들은 과거 철학사 연구의 현재주의적(presentist) 지적주의로부터는 거리를 두었지만, 그렇다고 과학사 연구에서 흔히 발견되는 맥락주의적(contextualist) 사회 구성주의를 완전히 수용하지도 않았다.
- 그 결과, 최근의 분석들은 여전히 불안정한 중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 이 책의 편집 목표는 최근 연구의 성과를 제시하면서도 이러한 방법론적 긴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포괄적인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다.
3. 맥락주의로의 전환 (The Contextualist Turn)
- 과거의 현재주의적 접근법
- 한두 세대 전의 철학사학자들, 특히 근세 철학 학자들은 현대적 관심사에 부합하는 자료를 찾기 위해 과거 저자들의 저작을 채굴하듯 연구했다.
- 이들은 데카르트나 존 로크 같은 근세 작가들을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등 오늘날의 논쟁에 참여하는 주체로 소환했다.
- 텍스트의 맥락 거세
- 이러한 과거의 접근법은 역사적 인물과 현대 인물을 몰역사적인 대화의 참여자로 간주함으로써, 과거의 사상을 현대의 범주에 맞추어 분석하는 경향을 낳았다.
- 또한, 한 저자의 다양한 저작들을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시스템으로 화해시키려 하거나, 철학자의 견해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여 가장 완벽한 버전으로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장려했다.
- 이는 데카르트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일지라도 “데카르트가 이랬어야 했다”는 식으로 정교화하는 작업을 의미했다.
- 이러한 체계화된 버전은 현재의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철학적 논증을 그 기원과 무관하게 시공간을 초월한 고립된 것으로 취급하여 텍스트를 맥락에서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 1990년대의 인식 변화
- 1990년대에 이르러 근세 철학사학자들은 텍스트의 일관성을 극대화하여 재구성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 학자들은 텍스트가 생산된 맥락에 훨씬 더 민감해졌다.
- 이후 세대의 학자들은 전통적인 역사 서술 방식이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깨달았고, 이에 따라 텍스트와 맥락의 경계는 더욱 흐려졌다.
- 시대착오적 범주의 한계
- 시대착오적인 범주화가 서로 다른 유형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아이디어 사이에 존재했던 풍부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가려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 당대의 데카르트나 로크 같은 인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형이상학, 인식론, 혹은 철학이라는 범주로 깔끔하게 구획할 수 없는 다양한 대화 상대 및 관심사들과 조우하며 자신들의 견해를 발전시켰다.
- 과학 혁명과의 얽힘
- 철학 연구에서 일어난 이 ‘맥락주의 혁명‘은 과학 혁명의 역사와 필연적으로 맞물리게 되었다.
- 근세 철학의 발전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윌리엄 길버트, 갈릴레오 갈릴레이, 윌리엄 하비 등이 이룩한 자연 현상 이해의 급진적 변혁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 맥락주의적 독해의 필수 조건
- 예를 들어, 데카르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당대의 수학자 및 ‘과학자들’과 가졌던 상호작용, ‘갈릴레오 사건’에 대해 보인 민감성, 그리고 그동안 의학사에 속하는 것으로만 여겨졌던 인물들과 나누었던 서신 및 독서 이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 따라서 과학사에 대한 인식은 근세 철학자들을 맥락 속에서 읽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다.
- 실제로 이러한 연구들은 ‘철학’과 ‘과학’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 자체가 후대의 개념화를 시대착오적으로 투영한 결과물임을 보여주었다.
4. 얻은 것과 잃은 것: 방법론적 합의의 붕괴
- 맥락주의의 구체적 성과
- 맥락주의로의 전환은 구체적인 성과를 낳았다.
- 역사적 주체들이 자신들의 실천을 어떻게 규정했는지에 대해 민감해지면서, 근세 지적 생활의 극도로 복잡한 풍경을 더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학자들은 대개 철학자로만 여겨졌던 인물들의 과학적 작업에 대해, 그리고 ‘과학자들’이 기여한 철학적 공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 연구 영역의 확장
- 최근의 학문적 성과는 과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근세의 사유 체계 전반을 광범위하게 포괄한다.
- 현대 과학과 철학의 중요한 선행 형태가 오직 ‘자연철학’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과거에는 주변부로 취급받던 의학이나 연금술 같은 탐구 영역에서도 철학적 중요성이 새롭게 탐지되고 있다.
- 방법론적 일관성의 해체
- 그러나 맥락주의 전환은 의도치 않은 결과로 이 분야의 방법론적 일관성을 해체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 최근의 개별 연구들은 각자 성공을 거두었을지언정 파편화되었으며, 기본적인 범주나 목표, 어휘를 공유하지 않는다.
- 따라서 이들을 하나의 일반적인 서사로 엮어내기가 어려워졌고, 이는 새로운 학술 연구와 교육 모두에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 전통적 분류 체계와 정전(Canon)의 동요
- 과거에는 데카르트를 ‘합리주의자’로, 로크를 ‘경험주의자’로 쉽게 배치하고 그에 따라 강의를 구성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범주들이 역사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요동치는 지적 지형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 마찬가지로 철학적 정전의 지위도 흔들리게 되었다. 이는 긍정적인 발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려운 선택을 강요한다.
- 예컨대 뉴턴이 철학사 강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면, 기존에 가르치던 인물 중 누구를 제외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 맥락주의적 명분이 우세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5. 분석과 서사의 대립(Analysis vs. Narrative)
- 두 방법론의 근본적 대립
- 현재의 방법론적 불확실성이 지닌 핵심은 ‘분석’과 ‘서사’의 근본적인 대립이다.
- 철학적 논증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 분석‘과, 그 논증이 시간을 거치며 발전해 온 과정을 기술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서사‘는 서로 상반되는 전제를 요구한다.
- 분석은 이론의 안정성과 독립성을 전제하는 반면, 서사는 이론의 가변성과 선행 조건에 대한 의존성을 전제한다.
- 딜레마를 피하기 위한 양극화
- 학자들은 이러한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양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여왔다. 특히 영어권 세계의 철학사학자들은 분석 쪽으로 끌리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몇 가지 결과를 동반한다.
- 첫째, 앞서 언급한 것처럼 텍스트를 맥락으로부터 고립시키고 현대적 이해관계에 봉사할 수 있도록 텍스트 내부의 일관성만을 찾으려는 경향이 생긴다. 이는 현대적 문제에 가장 많은 정보를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좁은 범위의 정전(canonical) 인물들에게만 주의를 제한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 둘째, 역사적 선례들이 배경으로 밀려나기 때문에, 철학사학자들은 각각의 역사적 인물을 선행 조건이 없는 독창적인 혁신가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근세와 과학 혁명기를 과거와의 지질학적 대격변적 단절(catastrophic breaks)로 간주하는 시각에서 두드러진다.
- 셋째, 설명을 오직 지적인 고려 사항으로만 제한하려는 성향이 나타난다. 이는 추론을 연구하는 철학의 본질에서 기인하는 면도 있지만, 사회적·문화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맥락을 약화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철학사는 텍스트 내재주의(internalism), 현재주의(presentism), 단절주의(catastrophism), 지적주의(intellectualism)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 과학사학계의 반대편 극단: 이와 대조적으로 과학사 연구는 반대편 극단인 서사 쪽으로 강하게 끌린다.
- 과학사학자들의 목적은 현재적 적용을 위한 교훈을 얻는 것보다는 역사를 “실제 있었던 그대로” 파악하는 데 있다. 따라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역할을 포함한 맥락적 요인에 훨씬 더 많은 강조점을 두며, 정전에 얽매이는 일도 훨씬 적다.
- 이 접근법은 지적 발전의 연속성을 강조하므로, 애초에 ‘과학 혁명’이라는 것이 존재했는지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표준적인 입장이 되었다. 즉, 과학사는 외재주의(externalism), 고고학적 골동품 취향(antiquarianism), 균일론(uniformitarianism), 사회문화적 환원주의(socio-cultural reductivism) 경향을 띤다.
- 이 두 분야의 특징은 단순한 이분법이라기보다는 역사 서술 방법론의 스펙트럼을 나타내지만, 두 학문이 핵심적인 분석-서사 대립에 의해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 맥락주의 철학사의 과제
- 철학사에서의 맥락주의적 전환은 전통적인 분석적 극단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 그러나 이는 극단적 입장이 회피했던 ‘화해의 문제‘를 야기한다.
- 즉, 분석과 서사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맥락의 어디까지를 설명 요인으로 삼을 것인가(관련성의 한계는 어디인가), 사회적·정치적 요인이 중요한가 아니면 오직 지적 동기만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정전을 얼마나 파괴해야 하는가, 연속적인 전통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갑작스러운 혁신의 관점에서 할 것인가, 당대 행위자들의 범주만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시대착오적인 묘사도 허용할 것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 학계의 완전한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 과학철학계의 거울 효과
- 흥미롭게도 이러한 맥락주의 전환과 방법론적 불확실성은 인접 영역인 과학철학에서도 거울처럼 똑같이 나타난다.
- 분석적 과학철학과 서사적 과학사를 통합하겠다는 초기 열정은 이를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좌절되었고, 이 역시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이질적인 접근법들의 배열을 낳았다.
6. 학문 분야 중심의 역사학 (Disciplinary Histories)
- 편찬 방법론으로서의 ‘학문 분야(Discipline)’
- 근세 철학사학자들 사이에 방법론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점은 이 책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편집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 이에 대한 편집자들의 해결책은 ‘학문 분야(discipline)’를 분석의 단위로 채택하는 것이었다.
- 이는 조사하려는 현상을 먼저 분석적으로 구획한 뒤, 그것으로 이어지거나 파생된 영향력의 사슬을 면밀히 추적하는 서사를 구축하는 전형적인 연구 전략과 일치한다.
- 지적 경계와 사회적 제도로서의 학문 분야
- 이러한 연결 고리를 추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근세 사상가들이 스스로를 동료와 동일시하거나 적과 구별했던 특징들, 즉 한 학문 분야를 다른 분야와 구분 짓는 경계들을 조사하게 된다.
- 학문적 경계를 추적함으로써 학자들은 역사적 저자들이 취한 논쟁적 위치뿐만 아니라 그들이 대응하고 있었던 대안적 견해들까지 포착할 수 있게 된다.
- 또한 이는 맥락적 요인에 대한 민감성을 높여주는데, 근세의 학문 분야들은 순수한 탐구 영역이나 이론적 확신에 그치지 않고 학교, 파벌, 클럽, 아카데미 같은 ‘사회적 제도’이자 교수와 학습의 개념, 지식 생산 및 관리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 저자들이 서로 광범위하게 동의하더라도 학문적 경계의 서로 다른 편에 설 수 있었으며, 학문 분야를 분석 단위로 삼는 역사는 이러한 맥락적 고려 사항들을 수용할 수 있다.
- 학문의 증식과 재조직화 서사
- 학문 분야의 역사를 방법론으로 채택하면, 근세의 이야기는 지적 학문 분야들이 증식하고 재조직화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 이 시기의 지적 풍경을 살펴보면 다양한 문제의식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수많은 새로운 학문 분야가 출현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기존의 학문 분야들이 적대적이든 협력적이든 서로 접촉하는 순간들이 매우 생산적이었다.
- 이러한 상황에서는 경쟁하는 이데올로기와 방법론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교착 상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저자들이 이전에 분리되어 있던 분야들의 교리와 방법을 결합함에 따라 종종 새로운 학문 분야가 탄생했다.
- 융합과 새로운 학문의 탄생 사례
- 한 예로, 수학자들이 자연철학자들의 인과적 추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다양한 형태의 ‘물리-수학(physico-mathematics)‘을 낳았고, 이는 결국 고전 역학으로 이어졌다.
- 또 다른 예로는 논리학자들이 의학의 치유 방법을 사유 체계에 도입하려고 시도하면서 정립된 새로운 ‘사유의 기술(art of thinking)‘이 있다.
7. ‘과학 혁명’ 개념의 재조명과 정전의 역사화
- 역사적 서사에서 바라본 두 가지 시선
- 소급적이고 분석적인 관점에서 보면, 근세는 현대 세계를 만들어낸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발아한 시기이다.
-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이 ‘변곡점들’을 바라보면, 마치 텅 빈 들판에 외롭게 솟아오른 푸른 새싹처럼 고립된 새로운 사상의 방향성으로 보인다.
- 그러나 당대의 눈으로 아래에서 바라보는 맥락주의적·서사적 관점에서는 끊임없는 활동의 소용돌이가 관찰된다. 그 땅은 학문 내부 및 학문 간의 논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러한 마찰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와 전통이 자라났다.
- 오늘날 우리에게 이 활동의 많은 부분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더 이상 현대인들의 관심사가 아닌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 ‘과학 혁명’ 용어의 추상화
- 맥락주의자들의 통합적이고 중도적인 접근법은 ‘과학 혁명’이라는 개념의 무게감을 덜어내지만, 이를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않는다.
- 전통적인 역사학과 달리, 여기서 ‘과학 혁명’은 서사를 구축하는 뼈대를 제공하는 ‘세계상의 기계화’라거나 ‘과학의 발명’과 같은 거대한 주제적 호선(thematic arc)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근세인들 스스로가 무언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음이 드러나며, 비록 그들조차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적절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러했다. 맥락주의자들은 역사적 저자들 스스로가 구체제와 신체제 사이에 어떻게 변증법적 대립을 설정했는지 밝혀낸다.
- 따라서 이들은 ‘과학 혁명이 존재했는가’를 묻는 대신,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새로운 천문학’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갈릴레오에게 ‘새로운 과학’이 무엇이었는지,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위대한 대혁신’이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한다.
- 이로 인해 ‘과학 혁명’은 근세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모든 혁신을 포괄하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용어가 된다. 이 용어의 모호함은 연구의 중심 초점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것의 실재성이나 시간적 범위를 두고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다.
- 정전(Canon)의 역사화
- 이 역사학적 접근법이 지닌 특징 중 하나는 후대의 이데올로기적 범주화를 부과하는 것을 피한다는 점이다.
- 전통적인 철학사에서 중심적이었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라는 분류는 여기에서 의미 있는 개념 작용을 하지 못한다.
- 또한, 기존의 정전을 완전히 폭파하여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역사화’한다.
- 학문적 변증법을 주의 깊게 따라가다 보면 특정 인물들이 유독 거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어떤 입장에 신뢰성을 더해주는 권위자로, 혹은 어떤 입장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기피 대상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때로는 데카르트처럼 오랫동안 주목받아온 인물이기도 하지만, 다비드 고를레우스(David Gorlaeus)처럼 지금까지 그늘에 숨어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 따라서 이러한 흐름의 학자들은 정전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연구는 현대가 아닌 당대에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인물들의 집단에 여전히 중심을 두고 있다. 철학사학자들은 이 책의 포괄성에 놀랄 것이고, 과학사학자들은 그 배타성에 주목할 것이다.
8. 분석의 세 가지 층위와 책의 구성 (Granularity and Composition)
근세 학문 분야에 대한 분석은 세 가지 수준의 세밀도(granularity)로 구별되며, 이는 이 책의 기본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 가장 거시적인 층위 (Coarsest Level)
- 근세의 행위자들이 애초에 스스로를 어떻게 나누었는가, 즉 ‘근세의 학문 분야들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둔다. 이는 학문적 경계의 윤곽을 추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근세적 환경 속에서 ‘학문 분야(discipline)’라는 말 자체가 지닌 의미와 씨름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 제1부의 구성: 근세 학문 분야 전반에 관한 질문들을 다룬다. 르네상스 시기 복원된 고전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학문들이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당대의 평론가들이 스스로 목격한 새로움을 어떻게 분류하려고 고군분투했는지 기술한다. 또한 전통적 서사의 시작과 끝점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기계론적 철학’의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종파적 파벌이나 젠더, 공적·사적 제도 같은 외재적 요인들이 학문 형성에 미친 역할을 탐구한다.
- 중간 층위 (Finer Level of Resolution)
- 이 시기를 채웠던 다양한 개별 학문 분야들의 구체적인 활동을 명료하게 밝힌다. 여기에는 각 학문의 방법론과 핵심 전제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참여자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과 제안된 해결책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기술이 포함된다.
- 제2부의 구성: ‘사유의 기술’, 자연 마술, 기계적 예술, 학문적 의학, 베이컨주의적 자연사 및 실험실학, 별의 과학(천문학/점성술), 혼합 수학, 순수 수학, 뉴턴 이후의 수학적 물리학 등 개별 학문들이 어떻게 이론적 문제를 정립하고 해결책에 도달했는지 보여준다.
- 가장 미시적인 층위 (Specific Points of Contact)
- 학문 분야들이 서로 만나는 구체적인 접점, 즉 서로 다른 지적 영역의 대표자들이 충돌하고 논쟁을 벌인 지점을 다룬다. 이러한 ‘변곡점’들은 후대 학자들에게 급진적인 변화(새로운 문제와 소설 같은 해결책)처럼 보이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 제3부의 구성: 근세 사상에서 일어난 중대한 에피소드들을 다룬다.
- 갈릴레오가 수학적 천문학을 자연철학에 개입시킨 사건, 망원경과 현미경 같은 새로운 광학 기구가 경험 과학 전반에 미친 영향, 데카르트 형이상학에서 비롯된 마음의 존재론 논쟁, 하비의 혈액 순환 주장 이후 해부학의 재조직화, 수학적 물리학의 출현에 따른 자연법의 재해석, 그리고 신체적 실체의 존재론, 신과 자연계의 관계, 물리적 상호작용에서 어떤 양이 보존되는가에 관한 중요한 논쟁들을 다룬다.
1. The Uses of Ancient Philosophy
1-1. 도입: 과학 혁명에 책(Books)을 되돌려놓기
- 전통적인 근세 사상 서사의 왜곡
- 지적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전통적인 이야기가 존재한다.
- 근세 초기 이전의 유럽인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이 오직 책, 그중에서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읽는 것에서만 온다고 믿었다는 내용이다.
- 이후 인문주의자들이 고대의 다양한 철학 저작을 재발견하고 번역하면서 ‘권위자’의 수가 늘어났고, 단일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더불어 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주의, 플라톤주의, 회의주의 등 수많은 ‘-주의’가 등장했다는 서사이다.
- 철학자들이 점차 권위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경험 및 실험과 결합된 자신들의 이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스콜라 철학과 인문주의는 죽고 르네 데카르트를 성상파괴주의적 아버지로 삼아 ‘이성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골자이다.
- 전통적 서사의 근본적 오해
- 캐리커처처럼 단순화된 이 서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체로든 부분으로든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 그러나 이는 당대의 논쟁에서 비롯된, 전근대 자연철학 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 로버트 보일과 같은 근세 인물들의 주장과 달리, 스콜라 자연철학자 중 누구도 자신들의 임무가 오직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지속된 인문주의적 성격
- 스콜라 철학자들의 활동이 서적 중심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자연에 대한 진리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용한 다양한 해석적 전략은 17세기의 가장 중요한 자연철학적 혁신가들의 작업 속으로 이어졌다.
- 데카르트가 서적 중심주의를 추상적 이성(또는 텍스트 없는 경험주의)으로 대체하여 인류 정신사에 대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생각은 18세기 프랑스 선전가들이 발명해낸 것에 불과하다.
- 실제로는 1700년 이후 한참이 지난 뒤에도 유럽의 자연철학자들은 광의의 의미에서 ‘인문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 그들은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으로 쓰인 고대 서적을 읽고 그에 대응했으며, 텍스트를 읽고 쓰는 행위는 이 시기 자연계를 연구하던 모든 이들에게 가장 근본적인 활동으로 유지되었다.
- 과학 혁명 철학의 새로운 이해
- 고대 텍스트 전통과의 지속적인 참여가 지닌 중심성을 인식한다고 해서 근세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 다만 이제 학계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변화가 막연한 과학적·철학적 ‘근대성’의 승리주의적 출현이 아니라, 근세 특유의 자연철학 방식이 낳은 산물이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 고대 텍스트의 도구적 성격
- 근세인들이 스스로 체감한 변혁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역사철학적 전제들을 재구성해야 한다.
- 고대 텍스트는 수용하거나 거부해야 할 ‘권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철학이 과거에 무엇이었고 앞으로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였다.
- 이 시기의 사실상 모든 방법론적 논의는 철학사의 계보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다시 그 역사의 바탕이 되는 문헌들에 대한 친밀한 지식에서 비롯되었다. 가장 중요한 발전은 형이상학이나 선험적(a priori) 추론에 기반을 둔 자연철학을 지적 막다른 골목으로 바라보는 역사적 계보를 구축한 것이었다.
- 이는 철학과 과학의 완전한 분리는 아니었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대한 단계였다.
1-2. 고대 문헌의 이용 가능성과 실제 활용
- 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Scholastic Aristotelianism)의 본질
- 과학 혁명이 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부터의 자각적인 전환이었다면, 먼저 거부당한 대상이 무엇인지 공정하게 규정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었다.
- 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자연적 신체의 원리를 그것을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부분들’, 특히 질료(matter)와 형상(form)이라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실체로 설명하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물리학(metaphysical physics)‘이었다.
- 라틴 서방에서는 이 형상이 ‘실체적 형상[substantial form]’으로 재개념화되었다.
- 상식적으로 세계가 개별화된 실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에, 철학자의 임무는 감각 가능한 우연성(accidents)을 넘어 추론함으로써 존재가 변할 때 발생하는 일에 대한 인과적 답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 이에 따라 교육과 주석, 독서의 초점은 주로 물질적 실체, 공간, 시간, 운동 등의 형이상학적-존재론적 분석을 도울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형이상학』, 『자연학』, 『영혼에 관하여』)에 맞춰져 있었다.
- 인문주의적 도전과 문헌의 확산
- 이 형이상학적 활동에 대한 첫 번째 중대한 도전은 반(反)스콜라적 인문주의자들(humanist anti-Aristotelians)로부터 왔다.
- 16세기 중반까지 인문주의자들은 알려진 고대 철학, 의학, 수학 텍스트의 대다수를 재발견하고 번역하여 출판했다. 고대 철학자들과 학파들에 대한 정보는 고대 철학 단편 주석집 등의 출판을 통해 수집되었고, 앙리 에티엔의 『철학적 시학』(1573) 같은 새로운 선집들도 만들어졌다.
- 교과서에 스며든 고대 철학: 결과적으로 17세기에 이르러 교육받은 사람들은 종교 변증학, 성서 주석학,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연철학 교과서 등 거의 모든 곳에서 고대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 가톨릭 세계의 예수회 코임브라 주석서(1591~1606)와 개신교 세계의 마르쿠스 프리드리히 벤델린이 쓴 『자연학 고찰』(1625~1628)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 코임브라 주석서(Commentarii Collegii Conimbricensis Societatis Iesu)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 1권에서 비판한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가들의 견해를 길게 설명하며, 이들을 이집트나 칼데아인들과 유사하게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제1원리를 철학한 유물론적 활물론자로 분류했다.
- 한편 벤델린(Wendelin)은 교과서 서두에 철학사에 대한 상세한 에세이를 실어, 성서의 족장들로부터 칼데아, 이집트, 그리스인에 이르기까지 “자연 연구가 명백히 신성하고 거룩한 것”임을 인정한 사상가들의 긴 목록을 제공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사상가들 중 누구도 물리학을 엄밀한 과학(scientia)으로 여기지 않았던 회의주의적 풍토에 맞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발전했다고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 지식 유통의 특징과 새로운 아이디어의 도입
- 유럽 전역에서 읽힌 이러한 사례들에서 두 가지를 주목할 수 있다.
- 첫째, 교과서 저자들이 스스로 문헌학적 연구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연구된 인문주의자들의 성과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 벤델린의 경우 고대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대 회의주의자’의 구도로 바라보는 시각을 잔프란체스코 피코 델라 미란돌라에게서 가져왔다.
- 둘째, 역사적 주석과 서술이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 과거에는 고대 텍스트를 고려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작업이라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 가상디와 그레고리의 혁신적 사례
- 피에르 가상디(Pierre Gassendi)는 기독교 신학과 호환 가능한 범위 내에서 ‘에피쿠로스주의’를 채택했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는 고대 텍스트를 권위로서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 철학에서 어떤 경로가 유용했고 어떤 경로가 막다른 골목이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역사적-철학적 훈련의 일환으로 접근한 것이다.
- 그는 에피쿠로스의 많은 핵심 교리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자연철학을 감각 경험과 실험에 철저히 고정시켰다. 가상디의 이러한 비교 분석은 그의 사후 출간된 『철학 종합(Syntagma philosophicum)』(1658)에서 완전한 자연철학 체계의 기초로 기능했다.
- 또 다른 사례로 1690년대 중반 옥스퍼드에서 천문학을 가르친 데이비드 그레고리(David Gregory)가 있다. 그는 석좌교수의 의무 규정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를 강의해야 했으나, 형식은 따르되 내용은 고대와 현대의 천문학적 해답을 요약하는 도구로 주석을 활용했으며, 결국 뉴턴주의적 해답이 가장 우수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방식으로 강의를 채웠다.
1-3. 역사적 서사의 방법론적 활용과 인문주의적 비판
- 방법론 논쟁의 역사적 성격
- 16세기와 17세기 유럽 역사에서 자연철학의 방법론, 특히 관찰, 경험, 실험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논쟁되었다. 당시 등장한 ‘실험 철학’은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사변적·관조적 과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자연철학의 전통적 정의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방법론적 논쟁은 대개 역사 서술의 형태를 띠고 진행되었으며, 인문주의에서 비롯된 스콜라 철학 비판이 17세기 대사상가들의 방법론적 담론으로 직결되는 흐름을 보였다.
- 인문주의적 반(反)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장기적 영향
- 일부 철학사학자들은 인문주의자들의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저작이 표면적이고 깊이가 없다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이들의 논리적 일관성 여부와 상관없이, 인문주의적 반스콜라주의 및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초기 혁신가(novatores) 세대뿐만 아니라 17세기 후반 왕립학회의 ‘실험 철학자들’에게까지 장기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언어적 단순화 요구 (첫 번째 논거)
- 로렌초 발라, 잔프란체스코 피코 델라 미란돌라, 마리오 니졸리오, 페트루스 라무스 같은 위대한 인문주의적 반스콜라 학자들의 일차적 목표는 새로운 자연철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을 개혁·근절하고 수사학과 정화된 라틴어 스타일을 진흥하여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의 제도적 위상을 높이는 것이었다.
- 이 과정에서 이들이 개발한 세 가지 핵심 논거가 자연철학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 첫 번째는 언어적 단순화 주장이다.
- 발라는 스콜라 철학의 10대 범주, 6대 초월자, 실체와 질료, 현실태와 잠재태 같은 공허한 개념과 기술적 전문 용어의 무용한 상부구조를 과감히 잘라내고, 신체적·정신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개별 실체라는 ‘상식적 세계관’의 기본 요소로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反)추상주의적 논조는 스콜라 철학을 대체하려던 후대 자연철학자들(예: 존 로크)에게 매우 매력적인 무기가 되었다.
- 형이상학적 부분들에 대한 해체 (두 번째 논거)
- 두 번째는 감각적 증거가 없는 형이상학적 개체들의 오도된 실체화(reification)가 올바른 철학적 방법론을 타락시켰다는 비판이다.
- 인문주의자들은 형이상학이 구체적인 사물 세계를 명확히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이론적 상부구조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렸다.
- 발라는 10대 범주를 실체, 성질, 작용의 세 가지로 축소했고, 니졸리오는 실체와 성질만을 수용했다. 피코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작에 영감 받아 우연성(accidents) 연구만으로는 사물의 본질(essences)을 파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엄밀한 과학(scientia)을 구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 이 라인의 비판은 프란시스코 산체스의 『아무것도 알 수 없다』(1581)와 가상디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반박 역설적 연습』(1624)으로 이어졌다.
- 학문 분야의 경계 재설정
- 이러한 비판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본질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한 것처럼 다소 과장한 측면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철학의 학문적 경계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는 효과를 낳았다.
- 니졸리오는 정신의 추상 관념을 다루는 형이상학적 ‘의사철학(pseudophilosophy)‘(그는 이를 플라톤 및 당대 철학자들이 읽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연계했다)을 감각으로 지각 가능한 개별 대상을 조사하는 진정한 자연철학(그는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 저작들과 연계했다)과 명확히 대조했다. 이러한 수사학적 대조는 향후 자연철학자들이 학문적 헤게모니 싸움을 벌일 때 강력한 탄약이 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의 오염 규명 (세 번째 논거)
- 세 번째 주요 논거는 문헌학적 기법을 동원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전집(Corpus Aristotelicum)이 심각하게 부패하고 혼란한 상태임을 증명한 것이다.
-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논리학적 요소들이 자연철학적 요소들과 무분별하게 뒤섞였다는 비판이 피코와 16세기 후반 프란체스코 파트리치에 의해 전개되었다.
-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선행 사상가들을 비판할 때는 그들의 견해를 왜곡했고, 가치 있는 내용을 내놓을 때는 그들의 사상을 표절했다는 역사적 주장이 덧붙여졌다. 이 주장은 한 세기 뒤 영국 왕립학회 변증가들에게까지 고스란히 계승되어 반복되었다.
1-4.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주의와 형이상학으로부터의 해방
- 파도바 학파의 세속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 인문주의적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논거는 제도권 자연철학자들에 의해 수용되면서 강력한 파급력을 얻었다.
- 특히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교(University of Padua)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른바 ‘세속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secular Aristotelians)은 제도권 내에서 자연철학을 형이상학으로부터 최초로 해방시키기 시작했으며, 감각 경험의 역할을 강조했다.
- 이들은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와 알렉산드로스 같은 그리스 주석가들의 영향 하에 『자연학』이나 『형이상학』 대신 감각 가능한 신체와 그 원리(4원소와 감각적 성질)를 다루는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기상학』 4권을 주로 가르쳤다.
- 자연주의적 전환과 사변 비판
- 피에트로 폼포나치, 시모네 포르치오 같은 교수들의 강의와 저작에서는 자연철학 지식의 원천으로서 감각 지각이 강력히 강조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강조가 기존 스콜라 자연철학의 형이상학적 틀과 양립할 수 없다는 도발적인 주장이 제기되었다.
- 포르치오는 스콜라 학자들의 형이상학적 접근이 ‘실체적 형상’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도입하여 진정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타락시켰으며, 사물의 본성은 오직 감각적 성질에 의해 결정되므로 경험적 조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논증했다. 이는 17세기 교과서들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결론이었다.
- 경험적 자연철학의 예견
- 이러한 움직임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 교육 전반의 광범위한 변화를 촉발하여, 물리학 내부에서 ‘자연주의적’ 부분과 ‘형이상학적’ 부분을 의식적으로 분리하게 만들었다.
- 이는 17세기 후반에나 주로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졌던 반(反)사변적 언어의 확산을 낳았다.
- 일례로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깊은 영향을 준 베르나르디노 텔레시오(Bernardino Telesio)는 그의 대작 『자연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1565) 서두에서, 자신은 순전한 이론적 사변의 결과물인 자연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다루지 않고, 오직 감각 지각에 명백하거나 그로부터 즉각 도출될 수 있는 것에 기초하여 자연철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 이는 자연 연구가 궁극적인 존재론적 본질을 구하기보다 속성, 우연성, 중간 원인(intermediate causes)에 대한 지식에 만족해야 한다는 사상의 전초전이었다.
- 범유럽적 방법론 논쟁으로의 확산
- 스콜라 물리학이 자연철학을 형이상학 및 추상적 추론과 섞어 오염시켰다는 신-인문주의자들의 비판은 17세기 ‘새로운 철학자들’의 핵심 슬로건이 되었다.
- 베이컨, 니콜로 카베오, 켄엘름 디그비, 가상디, 토머스 홉스, 아이작 뉴턴 등 매우 이질적인 사상가들이 파트리치 등 16세기 선구자들로부터 이 논거를 직접 취해 사용했다. 조셉 글랜빌 같은 왕립학회 변증가들도 이 논리를 재배치했으며, 로버트 보일 역시 철학이 자연의 현상과 원리에 기반하기보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논리학적으로 변질되었다고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했다.
- 보일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단순히 영국 ‘경험주의’의 독창적인 대표자여서가 아니라, 지난 1세기 반 동안 축적된 범유럽적 방법론 논쟁의 정점을 보여 주는 결과물이었다.
1-5. 인문주의 의학과 경험의 가치 격상
- 근세 지적 변혁에서 의학의 중요성
- 근세의 지적 대전환기에서 의학이 지닌 중요성은 흔히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으나, 당시 의학은 자연에 대한 관심을 합법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전문 직업이었다.
- 의사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의학의 역사와 맞물려 있었으며, 특히 갈레노스(galen)와 켈수스(Celsus)의 저작을 통해 알려진 고대의 세 가지 학파인 ‘합리주의파=교조주의파(Rationalists=Dogmatics)’, ‘경험주의파(Empirics)’, ‘방법주의파(Methodics)‘의 방법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 의학계 내부의 지위 싸움과 역사적 문헌의 동원
- 당시 파라셀수스주의 의사, 약제사, 외과 의사들은 종종 ‘경험주의파’와 동일시되었으며, 대학 교육을 받은 주류 의사들로부터 철학적 식견이 부족하여 지적으로 얕고 위험하리만치 무책임하다고 비하당했다.
- 이에 대응하여 경험 중심의 의료 실천가들은 인문주의자들이 발굴해낸 고대의 새로운 텍스트들, 특히 히포크라테스 전집과 디오스코리데스의 저작을 동원하여 경험적 지식의 지위를 격상시키고자 했다.
- 히포크라테스주의를 통한 사변 비판
- 페트루스 세베리누스, 게르하르트 도른, 조제프 뒤셰느, 얀 밥티스타 반 헬몬트 같은 파라셀수스주의자들은 감각을 통해 획득한 지식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다. 이들은 히포크라테스 시절에 정점을 찍었던 경험적 지식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이후 ‘사변적’ 갈레노스주의가 도입한 파괴적인 추상 관념들로 인해 타락해버렸다는 역사 서사를 구축했다.
- 이를 통해 자신들의 경험적 히포크라테스주의야말로 진정한 ‘학문적’ 전통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 실제로 관찰(observatio)이라는 용어가 활발히 사용되고, 관찰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현상(phaenomena)’이라는 단어가 철학 및 과학계에 도입된 것은 바로 고대 경험주의·회의주의 철학의 어휘를 복원한 ‘네오-히포크라테스 의학 서클’ 내부에서였다.
1-6. 주류 의학계의 역사적 대응과 합리적 경험주의
- 주류 의학계의 역사학적 반격
- 대학 교육을 받은 정통파 의사들 역시 자신들의 전통이 진정으로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전통임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적 서사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합리주의 의학이 중세나 아랍 의사들이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고 변호했다.
- 특히 1525년 그리스어판 갈레노스 저작집의 출간은 갈레노스 의학에서 해부학이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지 밝혀주었으며,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1543) 서문에서 보여준 태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 형이상학의 군림에 대한 거부
- 갈레노스 저작의 영향력 있는 주석가였던 조반니 아르젠테리오는 피코 등의 반스콜라주의 저작에 영향을 받아, 의학의 위상이 역사적으로 “스스로 더 높은 지위를 가식하려는 게으른 철학자들”에 의해 격하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모든 예술과 과학에 원리를 제공하겠다고 군림하는 형이상학의 오만한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 완전한 의사(total medicus) 모델의 부활
- 사변적 철학이 의학을 부패시켰다는 부정적 비판과 더불어, 정통 의사들과 그 경쟁자들은 고대 의사들이 수많은 실용적 의학 분야를 직접 실천했음을 강조했다. 즉, 의사와 약제사 등으로 역할이 쪼개진 현대적 모델과 달리 고대의 원형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완전한 의사(total medicus)‘였다는 주장이다.
- 합리적 경험주의(Rational Empiricism)의 정립
- 이러한 논의의 결과로 ‘합리적 경험주의‘가 도출되었다.
- 이는 환자의 병력 기록(case histories)을 포함하여 학문적 의학의 경험적 구성 요소에 초점을 맞추되, 이것이 결코 가공되지 않은 순전한 실험들(nuda experimenta)로 환원될 수 없으며, 체계적으로 조직되고 이성적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입장이었다.
- 관찰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역사적 수정주의에 힘입어 ‘경험 의학의 철학화’와 ‘자연철학의 경험화’를 동시에 달성하는 효과를 낳았다.
- 의학의 모든 기반을 해부학에 두려 했던 히에로니무스 파브리치우스의 파도바 기반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는 윌리엄 하비가 혈액 순환 발견의 철학적 지위를 방어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하비는 “관찰 그 자체가 지식의 한 형태”라고 주장했다.
1-7. 화학적 실험주의와 베이컨으로의 연결
- 데모크리토스 페르소나의 활용
- 관찰과 실험의 위상을 높이고 비감각적 사변을 조롱하기 위한 역사적 논거는 비주류 전통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 화학자(chymists)들과 의학화학자(iatrochymists)들은 자신들의 학문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정신과 일치시키려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활용된 것은 두 개의 위작(pseudepigrapha)에서 유래한 ‘해부하는 자연주의자로서의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the dissecting naturalist)‘라는 페르소나였다.
- 데모크리토스가 비교해부학자로 등장하는 『다마게투스에게 보내는 편지(Epistola ad Damagetum)』와 그가 이집트 연금술의 계승자로 등장하는 『자연학과 신비학(Physica et mystica)』 덕분에, 근세의 실천가들(뒤셰느, 안드레아스 리바비우스 등)은 자신들을 해부학, 화학적 분석, 기계론적 모델 구축을 포함한 실험적 접근법을 따른 데모크리토스의 후계자로 포장할 수 있었다.
- 철학적 추상화에 맞선 화학적 실험주의
-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교리적 오류, 특히 질료형상론(hylomorphism)이 자연철학에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잘못 적용한 방법론적 오류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 즉, 플라톤에게서 유래하여 갈레노스주의자들까지 공유하게 된 오만한 합리주의의 산물이라는 비판이다.
- 그들이 사변에 맞서 내세운 ‘데모크리토스’는 환원주의적 원자론자가 아니라, 리바비우스의 표현대로 “신체의 자연에 대해 보고하고 자연과학을 세울 때 우리 마음의 허구를 따르지 않고, 오직 이성과 경험을 동반한 감각이 신체의 자연 안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들만을 상정하는” 화학적 실험주의자였다.
- 스콜라 물리학 비판의 범유럽적 확산
- 스콜라-아리스토텔레스주의 물리학에 대한 방법론적 공격이 실험적(개념화된)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가들에 대한 찬양과 결합된 것은 바로 이 의사들의 손을 통해서였다.
- 이들은 그 사상가들의 물질 이론을 환원주의적 존재론으로 완전히 흡수하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럽게 채택했다. 의사들은 이러한 주장이 특히 프랑스 등지로 널리 확산되는 데 영감을 주었다.
- 1624년 8월 파리를 뒤흔든 에티엔 드 클라브의 반(反)질료형상론적 테제나, 의학 교육을 받은 세바스티앙 바송이 『아리스토텔레스 반박 자연철학 12권』(1621)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제자인 신화적 히포크라테스를 극찬한 것이 대표적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의 역사관에 미친 영향
- 프랜시스 베이컨 역시 세베리누스 같은 의학·화학 저술가들의 주장과 파트리치의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전통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자연철학사 관점을 획득했다. 베이컨은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데모크리토스와 히포크라테스가 그들의 정교하고 정제된 후속 세대들(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보다 “가식과 과시 없이 더 조용히, 진지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진리 탐구에 헌신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서사의 변형된 형태들은 18세기까지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1-8. 자연의 수학화와 대안적 인과 설명
- 고대 수학 텍스트의 도구적 부활
- 이른바 ‘자연의 수학화’ 과정에서도 역사적 논거는 방법론적 발전을 이끄는 핵심 요인이었다.
- 이는 오랫동안 회자되던 정형화된 ‘플라톤주의’나 ‘피타고라스주의’의 출현과는 무관했다. 오히려 파푸스, 아르키메데스, 헤론의 저작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작으로 여겨진 『역학 문제집』 같은 고대 수학 텍스트들이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자극하고, 자연철학이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신선한 개념을 제공하면서 대학교과 과정에 수학이 통합되는 결과를 낳았다.
- 고대 텍스트 기반의 연구 프로젝트
- 고대 수학 문헌들은 맹목적인 권위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연구를 촉발했다.
- 파푸스와 연계되어 모든 단순 기계를 ‘지레의 원리’로 설명하려던 프로젝트는 귀도발도 델 몬테에 의해 부활하여 갈릴레오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고, 넓은 의미에서 17세기 역학의 핵심 구성 요소가 되었다. 프랑수아 비에트는 자신의 개척적인 대수학 작업을 파푸스가 묘사했던 고대 기하학적 분석 기술의 복원으로 제시했다. 빌레보르트 스넬 등 다른 수학자들은 인문주의 석학 조셉 스칼리게르에게 배운 텍스트 교정 및 추정 기법을 동원해 고대 유실 문헌의 복원을 시도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페트루스 라무스 같은 교육 개혁가들의 기획과 맞물려 확산되었다.
- 데카르트가 『기하학』(1637)에서 추구한 것 역시 그리스인들의 ‘잃어버렸거나 숨겨진’ 분석 방법을 재구축하는 작업이었다.
- 수학적 증명의 인과적 지위 논쟁
- 복원된 텍스트에서 얻은 아이디어들은 수학적 설명이 자연철학의 전형적인 특징인 ‘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학문적 분쟁으로 이어졌다.
- 예컨대 아르키메데스의 『평면의 균형에 관하여』는 정의하기 극도로 까다로운 ‘무게중심’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인과론적 용어로 재기술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저작과 『역학 문제집』에 수록된 문제들은 현상을 ‘지레’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모델을 제시했고, 이는 대학 안팎에서 역학이 자연 현상을 설명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제안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 ‘형이상학적 물리학’에 대한 수학자들의 반격
- 수학자들은 본질(essences)을 다루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학의 철학적 지위를 격하하려던 알레산드로 피콜로미니나 베니토 페레이라 같은 자연철학자들의 비판에 맞서, 인문주의적 반스콜라주의의 ‘반(反)본질주의’를 무기로 삼아 반격을 시도했다.
- 이들은 수학이 모호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사물의 ‘본질’이나 ‘본성’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영역 안에서 자연에 대한 명확한 확실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페데리코 코만디노는 1558년 아르키메데스 전집 헌사에서 철학자들이 근본 원리를 두고 벌이는 끝없는 다툼을 지적하며, 물리학(physiologia)과 형이상학은 다양한 추측에 기반한 개연성에 머무는 반면 수학은 확실성을 제공하므로 speculative한 과학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고 논증했다.
1-9. 갈릴레오의 현상학적 인과론과 물리-수학의 확산
- 수학적 확실성과 본질주의 거부
- 수학이 본질을 두고 다투는 대신 감각적 성질(affectiones)에 대한 확실성을 제공한다는 논거는 갈릴레오를 거쳐 뉴턴에 이르기까지 자연철학을 수학화하려는 캠페인의 핵심이 되었다.
- 예수회 학자 주세페 비앙카니는 『수학의 본성에 관하여』(1615)에서 수학의 대상이 우연성(양)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대해, “물질적 실체를 둘러싼 수천 가지 이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아무런 인식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것보다, 우연성에 대한 수많은 경이로운 진리를 아는 것이 훨씬 낫다”고 답했다. 비앙카니는 수학이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성질의 확실한 인과적 지식을 생산하므로, “현상은 지각하는 자가 알지만 원인은 수학자가 증명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 따라 혼합 수학이 자연물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식을 낳는다고 보았다.
- 갈릴레오의 속성 중심 연구 프로그램
- 갈릴레오는 비앙카니보다 더 나아가 인과적 설명의 추구를 격렬히 비난하고, 수학적 과학의 원리가 감각 경험에서 도출되면서도 확실한 증명력을 지님을 확언했다.
- 부력 논쟁 당시 전통 철학자들이 갈릴레오를 향해 자연적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자, 갈릴레오는 인과관계를 현상학적(phenomenological) 용어로 재포착하며 4원소 같은 내부 구조적 설명 대신 감각으로 즉각 알 수 있는 근접 원인(무게 등)을 통한 설명으로 전환했다. 그는 『태양흑점에 관한 세 번째 편지』(1612)에서 사물의 진정한 내부 본질을 꿰뚫으려는 헛된 시도를 벌이는 철학자들과 달리, 자신은 사물의 ‘속성(affezioni)’ 몇 가지를 아는 것에 만족한다고 선언했다.
- 갈릴레오 추종자들과 ‘물리-수학’의 등장
- 카발리에리, 토리첼리, 카스텔리, 비비아니 같은 갈릴레오의 제자들은 기초적인 존재론이나 인과적 주장을 배제한 채 아르키메데스적 방식으로 역학과 수학의 교훈을 운동 물리학에 행복하게 적용했다(이것이 데카르트가 갈릴레오를 향해 품었던 불만의 원인이었다).
- 이들은 더 웅장한 역사철학적 계보를 동원해 자신들의 접근법을 정당화했다.
- 예컨대 발리아니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모두 상상의 산물이라 공격하며, 경험과 실험을 통해서만 원리를 확립하는 수학자들과 의학화학자들의 연합된 접근법이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흐름은 프랑스의 마랭 메르센 등으로 이어져 자연 지식을 현상에 국한된 우연성의 수학적 과학으로 다루는 ‘물리-수학(physico-mathematics)’ 기조를 형성했다.
- Blaise Pascal의 진공 실험을 옹호한 피에르 기파르 등은 선험적(a priori) 추론에만 의존하는 철학자들에 맞서, 감각의 확실성에 기반을 둔 고대 데모크리토스 계열의 경험적 자연주의를 소환하는 역사적 장치를 활용했다. 아이작 배로 역시 1660년대 루카스 석좌 강의에서 수학이 인과적 과학(causal scientia)으로서 자연철학의 중심에 서야 함을 역설하며 유사한 역사학적 재작업을 수행했다.
1-10. 결론: 반(反)철학으로서의 과학 혁명 철학
- 제도화된 과학의 인적 구성과 사변 disclaim
- ‘위대한 철학자들(데카르트, 홉스, 스피노자, 로크, 라이프니츠)’의 정전체제와 가상의 ‘영국 경험주의’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시각은 17세기 후반 왕립학회,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치멘토 아카데미 등에서 신과학의 제도화를 이끈 주역들이 대부분 대학 교육을 받은 의사들과 혼합 수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가려왔다.
- 초기 왕립학회에서 활약한 핵심 인물들은 주로 17세기 중반 옥스퍼드에서 생리학이나 수학적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다.
- 따라서 신과학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정당화가 인문주의적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의사, 혼합 수학자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랐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스프랫과 글랜빌의 왕립학회 변호론은 형이상학과 선험적 추론이 철학을 경험의 바른 길에서 이탈시켰다는 파트리치와 가상디의 역사적 논거에 전적으로 빚지고 있었다.
- 아웃라이어로서의 데카르트
- 이러한 역사철학적 전제는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혼합 수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새로운 ‘형이상학적 물리학’ 프로젝트에 즉각적인 회의론을 품게 만들었다.
- 장 르 클레르 같은 이들은 데카르트주의를 스콜라 철학과 다를 바 없는 선험적 연역주의라 가르치며, 궁극적 원리에 대한 가설을 세우기보다 데모크리토스처럼 실험과 진리 탐구에 일생을 바치는 것이 유용하다고 결론지었다.
- 과학 혁명의 핵심이 질료형상론적 형이상학에서 기계론적 형이상학으로의 전환이라는 기존 서사는 데카르트와 그 추종자들에게 너무 과도한 비중을 둔 왜곡이다.
- 다수의 자연철학자들에게 기계론적 존재론, 특히 유기체적 생명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터무니없어 보였으며, 데카르트는 그저 과거의 오류(제1원리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를 반복하는 또 다른 체계 구축가에 불과했다.
- 보일이 지적했듯, 데카르트주의자와 에피쿠로스주의자 모두 모든 개별 현상을 원자의 기계적 속성에서 연역해낼 수 있다고 가식하는 동일한 오류를 범했다.
- 이차 원인과 현상학적 설명으로의 제한
- 새로운 자연철학자들은 애니미즘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라, 기저의 원리와 존재론에 관한 모든 사변을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다.
- 실험가 피에르 프티는 열과 냉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원자론의 설명을 모두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일축하고, 자신의 기계론을 철저히 ‘이차 원인(second causes)’에만 국한시켰다.
- 보일 역시 기계론적 철학의 꿈을 꾸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자연철학의 전체 체계나 요론을 작성할 의도가 없음을 명확히 했다. 역사적 용어로 표현되자면, 스스로를 제한하여 이차 원인의 관점에서 특정 현상에 대한 현상학적(phenomenological) 설명에 만족하겠다는 이 명확한 사변 거부(disavowal)가 바로 과학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현상의 심장이었다.
- 뉴턴의 역사관과 반철학적 세계관의 완성
- 이러한 조건 하에서 ‘과학 혁명의 철학’은 하나의 ‘반(反)철학(anti-philosophy)’이었다.
- 그것은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이 처음 개발한 역사철학적 세계관으로,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제1원리를 탐구하는 행위 자체를 철학적 오류와 무익함의 가장 큰 원천으로 단죄하는 성격을 지녔다.
- 이 세계관의 강력함은 뉴턴에게서도 확인된다.
- 뉴턴은 1710년대에 극도로 정교한 철학·종교사를 발전시키며, 태양중심설을 인식했던 근원의 철학적 종교가 형이상학이라는 (의사)학문에 의해 점차 타락하면서 이교의 우상숭배, 사변적 자연철학,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라는 온갖 오물이 발생했다고 보았다.
- 근본적인 존재론적 수준에서 중력의 작동 기전을 구태여 설명하려 들지 않으면서도 보편인력의 법칙을 상정하는 수학적 물리학은, 뉴턴으로 하여금 철학적 오류와 종교적 부패를 낳았던 사변적 철학에 단 한 걸음도 발을 디디지 않은 채 수많은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뉴턴의 천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의 고유한 비전 역시 2세기에 걸쳐 무르익은 이 ‘반철학적’ 지적 전환의 거대한 산물이었다.
2. Novatores
2-1. 도입: ‘노바토레스(Novatores)’라는 범주의 출현
- 소렐의 혁신가 요약집
- 1655년 초 파리에서 인간의 지식 활용부터 군주 교육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문집인 『인간의 완성에 관하여(De la perfection de l’homme)』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 이 문집에 수록된 에세이 중 하나가 바로 “철학에서 현대 혁신가들[Novateurs Modernes]의 가장 기이한 의견들에 대한 요약(Summary of the strangest opinions of the modern innovators [Novateurs Modernes] in philosophy)“이다.
- 저자인 샤를 소렐은 프랑스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작가였으며, 이 요약집은 지식을 갖춘 일반 대중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한 ‘현대인들’의 그룹을 알리기 위해 작성되었다.
- 노바토레스 명단과 용어의 유통
- 소렐은 이 에세이에서 베르나르디노 텔레시오, 프란체스코 파트리치, 지롤라모 카르다노, 페트루스 라무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조르다노 브루노, 다비드 고를레우스, 세바스티앙 바송, 토마소 캄파넬라, 르네 데카르트 등 수많은 저자의 긴 목록을 제공했다.
- 이 현대적 사상가들은 ‘노바토레스(novatores, 혁신가들)‘라는 하나의 통일된 범주로 취급되었다.
- 이 용어는 이미 17세기에 널리 유통되고 있었으며, 매우 논쟁적인 단어로서 근세 초기의 수많은 논쟁에서 중심 무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 논쟁적 범주로서의 가치
- ‘노바토레스’라는 용어는 역사의 실제 참여자 범주(actors’ category)와 후대 분석가 범주(analysts’ category) 사이의 친숙한 경계를 초월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논쟁적 범주(polemical category)‘이다.
- 따라서 이 용어의 기원, 역사, 활용을 추적하는 것은 흔히 ‘과학 혁명’이라는 또 다른 논쟁적 라벨로 지정되는 철학의 거대한 대전환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2-2. 신구 논쟁: 철학과 종교의 얽힘
- 종교적 맥락에서의 혁신 혐오
- ‘노바토레스’는 광범위한 문화적 공명을 가진 단어였다.
- 당시 종교적 문제에서 ‘혁신(innovating)’은 공포와 비판의 대상이었다.
- 개신교와 가톨릭 진영 모두 자신들이 새로운 교리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고대의 진리를 복원하고 있는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역사를 재작성하려 시도했다.
- 동시에 양 진영은 상대방이 새로운 믿음과 기이한 이단(novel heresies)을 도입하고 있다고 격렬히 비난했다.
- 따라서 ‘노바토르(혁신가)’라는 말은 신학자들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을 비방하기 위해 사용한 경멸어였다.
-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연합
- 그러나 유럽 대학에서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긴밀한 연결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개혁조차 이를 흔들지 못했다.
- 반대로 이러한 연합은 철학적 새로움에 걸린 판돈을 키웠는데,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곧 정통 신학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멸칭은 신학에서 철학 영역으로 이주하여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거부하는 자’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1620년대에 이르러 ‘노바토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철학을 버리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이들을 단죄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 마랭 메르센(Marin Mersenne)의 노바토레스 비판 (1623~1624)
- 마랭 메르센은 1623년 창세기 주석서인 『창세기 문제집(Quaestiones celeberrimae in Genesim)』에서 자신과 같은 가톨릭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을 비판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철학에 모순되는 견해를 개진하는 현대인들의 명단을 제시했다.
- 메르센은 독자들에게 전 세계로 거칠게 퍼지기 시작한 무신론자, 마술사, 이신론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주석의 순서를 따랐다고 밝혔다.
- 또한 경험과 현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성문화된 단어와 상충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오직 아리스토텔레스만을 따르고 맹세한다는 식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캄파넬라, 브루노, 텔레시오, 케플러, 갈릴레오, 길버트 등 최근 철학자들의 주장을 검토하고 반박했다고 기술했다.
- 메르센은 이 그룹을 명확히 ‘노바토레스’라고 불렀으며, 이후 저작인 『이 시대 이신론자, 무신론자, 자유사상가들의 불경함(L’impiété des deists, athées et libertins de cetemps)』(1624)에서는 바송, 베이컨, 플러드, 힐 외에 바니니, 카펜터, 고를레우스, 샤롱 등의 이름을 추가했다.
2-3.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지로 확산된 비판 체제
- 가브리엘 노데와 장 세실 프레이의 인식
- 17세기 전반기 이른바 ‘석학 자유사상가(libertins érudites)’ 중 한 명으로 종종 분류되는 프랑스 작가 가브리엘 노데(Gabriel Naudé) 역시 철학의 혁신가들을 언급했다.
- 그는 『마술 혐의로 허위 고발당한 모든 위대한 인물들을 위한 변호』(1625)에서 메르센의 명단과 상당 부분 겹치는 사상가들을 인용했다.
- 노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안다고 공언한 자연에 대한 모든 진리들이 오늘날 텔레시오, 파트리치, 캄파넬라, 베이컨, 브루노, 바송의 영도 아래 매일 증식하는 ‘혁신가들의 무리(swarm of innovators)’에 의해 매우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이 혁신가들의 실질적인 목적은 기존 철학을 밀어내 버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비판했다. 파리 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장 세실 프레이의 저작에서도 유사한 명단과 비판 의도가 발견된다.
-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논쟁과 마르틴 스호크의 공격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대안을 구축하려는 사상가 그룹의 출현을 인지한 것은 파리의 철학자들뿐만이 아니었다.
- 데카르트 스스로도 ‘노바토레스’를 언급했으며, 위트레흐트에 있던 그의 적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 마르틴 스호크(Martin Schoock)는 그의 반(反)데카르트 논쟁서인 『경탄할 만한 방법(Admiranda methodus)』(1643)에서 데카르트를 정확히 노바토레스의 맥락 속에 배치하고 그 일원으로 셈했다. 스호크의 책에는 위트레흐트 초기 분쟁의 핵심이었던 고를레우스와 타우렐루스가 자주 등장하며, 라무스, ‘두 명의 파트리치’, 텔레시오, 바송 등도 포함되어 있다. 스호크는 책 전반에 걸쳐 혁신과 혁신가들, 특히 데카르트를 가장 극단적이고 조롱 섞인 어조로 비판했다.
- 아드리안 헤레보르트의 우호적 분류
- 반면 레이던 대학교의 아드리안 헤레보르트(Adriaan Heereboord)는 노바토레스를 보다 우호적으로 다루며 이들을 두 진영으로 나누었다.
- 첫 번째는 옛것을 파괴하기만 하는 진영으로 비베스, 라무스, 파트리치(『페리파토스 논의』에서의 모습), 고를레우스, 캄파넬라, 텔레시오, 바송, 보트 형제 등을 꼽았다.
- 두 번째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는 건설적 진영으로 파트리치(『새로운 철학』에서의 모습), 베이컨, 코메니우스, 그리고 데카르트를 포함시켰다.
- 헤레보르트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출판된 저작들은 “진정한 철학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열쇠를 제시했고, 자연의 적지 않은 비밀을 폭로했으며, 사물에 대한 고정된 진리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그는 철학의 자유(libertas philosophandi)를 옹호하는 에세이에서도 이 혁신가들의 이름을 대거 인용했다.
2-4.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선구자들
- 초기 혁신가 명단의 일관성
- 노바토레스의 명단은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했으나, 그 시초는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사상가들인 베르나르디노 텔레시오, 프란체스코 파트리치 다 처소, 토마소 캄파넬라가 거의 항상 그 출발점에 위치했다.
- 베르나르디노 텔레시오(Bernardino Telesio)
- 프랜시스 베이컨은 텔레시오를 “새로운 철학자들의 첫 주자(novorum hominum primus)”로 간주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를 현대 철학의 진정한 아버지로 보았다.
- 샤를 소렐 역시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며, 텔레시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향해 “첫 타격을 가할 대담함”을 가졌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 소렐은 텔레시오의 주저인 『자연의 본성에 관하여』(1586년 확장판)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공격적으로 반대하고 ‘열(hot)’과 ‘냉(cold)’의 대립에 기초한 명확한 대안적 자연철학을 제공하려 시도했음을 강조했다.
- 프란체스코 파트리치(Patrizi da Cherso)
- 소렐은 다음으로 파트리치의 『새로운 우주 철학(Nova de universis philosophia)』(1591)을 다루며 그를 일종의 텔레시오 추종자이자 플라톤 교리를 부활시키려 한 인물로 묘사했다.
- 파트리치는 텔레시오의 원리(열, 냉, 물질적 질량)에 공간, 빛, 온기, 유동성을 추가했다. 소렐은 파트리치가 열의 일부로 빛을 포함시킨 점을 지적하며 그가 텔레시오에게 완전히 공정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 소렐은 이 최초의 아리스토텔레스 반대자들 진영에 이탈리아의 카르다노와 프랑스의 라무스를 덧붙여 결론지었다.
-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 캄파넬라는 텔레시오 철학의 강력한 옹호자였으며, 갈릴레오의 유죄 판결 당시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
- 소렐은 에세이에서 캄파넬라의 광범위한 관심사와 대담한 문체를 부각시켰다. 캄파넬라의 저작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Peripatetics)의 의견과 완전히 거리가 먼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자연학은 새롭거나 새로워진 의견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고대나 현대의 사상가들이 제안한 것 중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건드리지 않고 덧붙이거나 성찰하지 않은 주제가 없을 정도였다.
- 소렐은 그의 수많은 저작 중 『사물의 감각과 마술에 관하여』(1620)만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 소렐은 캄파넬라에 대해서는 짧게 서술한 반면, 브루노에 대해서는 그의 철학이 지닌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강조하며 우주의 무한성과 복수 세계관(plurality of worlds) 교리를 아주 상세하게 다루었다.
- 주목할 점은 소렐이 브루노의 견해에 대한 과학적 반론은 고려했으면서도, 다른 지구들의 존재가 그 주민들의 창조 및 구원과 관련하여 일으킬 수 있는 명백한 신학적 문제들은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소렐은 브루노가 자신의 견해 때문에 말뚝에 묶여 화형당한 사건에 대해 “그토록 아름다운 글을 쓴 이가 그처럼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것은 비극이다”라는 논평으로 논의를 끝맺었다.
2-5. 1620년대 전후의 차세대 혁신가들
- 짧아진 서술 분량
- 소렐은 차세대 노바토레스인 다비드 고를레우스, 네이선어널 카펜터, 세바스티앙 바송을 연이어 다루었다.
- 이들은 당대의 사실상 모든 노바토레스 명단에 존재했으나, 소렐은 초기 이탈리아 사상가들에 비해 이들을 상대적으로 짧게 취급했다.
- 다비드 고를레우스(David Gorlaeus)
- 소렐은 고를레우스의 사후 출간된 『철학적 연습(Exercitationes philosophicae)』(1620)을 언급했다.
- 흥미롭게도 소렐은 오늘날 독자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오는 고를레우스의 ‘원자론’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철학에 대한 그의 반대와, 원소가 오직 흙과 물 두 가지만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 나다니엘 카펜터(Nathanael Carpenter)
- 카펜터는 통념에 반하는 공허한 역설을 즐기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 그는 장소(place)는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원소는 무겁고, 감각은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혜성은 불타는 기상 현상이 아니라는 등 통념에 대항하는 주장들을 펼쳤다.
- 소렐은 특히 불이 촉촉하다(fire is moist)는 카펜터의 단언에 불만을 품고, 불 속에 아주 미량의 수분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것 때문에 불을 촉촉하다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 세바스티앙 바송(Sébastien Basson)
- 바송은 『아리스토텔레스 12권 반박 자연철학(Philosophiae naturalis adversus Aristotelem libri XII)』(1621)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으나, 이 책은 실제로 읽히기보다 인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 소렐 역시 이 책을 피상적으로만 검토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사물의 본성, 질료와 형상, 혼합물, 운동, 제1성질의 작용에 관한 바송의 “기이한 사상”을 매우 빠르게 짚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소렐은 바송의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강조했으나 다른 독자들이 주목했던 원자론은 강조하지 않았다.
2-6.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에 대한 평가
- 갈릴레오 갈릴레이
- 천문학 분야의 노바토레스를 다루는 연합 섹션(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등 포함)에서 소렐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적 작업을 강조했다.
- 그의 망원경 관찰과 코페르니쿠스 체계 옹호를 상세히 논했으며, 갈릴레오가 유죄 판결을 받고 철회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지자들은 이에 전혀 겁먹지 않았으며 태양이 부동이고 지구가 도는 것이 죄악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고 논평했다.
- 르네 데카르트
- 데카르트에 대한 서술은 소렐의 에세이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했다.
- 소렐은 『방법서설』의 핵심 테마인 코기토(cogito)와 신에 대한 호소를 요약한 뒤, 함께 실린 세 에세이(『기하학』, 『굴절광학』, 『기상학』)를 간략히 짚었다. 그러나 에세이의 나머지 부분은 철저히 데카르트의 과학적 저작에 집중되었다.
- 소렐은 『성찰』을 건너뛰고 곧바로 『철학 원리』로 나아가 그의 우주론과 지상 물리학, 특히 진공의 부정을 간략히 서술했다. 마지막으로 『정념론』을 언급했으나 구체적인 내용까지 상세히 다루지는 않았다.
- 데카르트에 대한 소렐의 찬사
- 소렐은 데카르트가 데모크리토스, 브루노, 장 데스파네 등 타인의 사상을 차용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데카르트 철학에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다.
- 그는 “모든 혁신가들 중에서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상으로부터 이토록 멀리 나아간 인물은 보지 못했다”고 평가하며 데카르트에게 추종자가 전혀 부족하지 않음을 주목했다. 소렐이 1668년에 출판한 개정판에서는 데카르트에 대한 서술이 훨씬 더 길어지고 찬사로 가득 차게 되었다.
- 명단에서의 주목할 만한 누락과 추가
- 소렐의 에세이에는 다른 명단에 흔히 등장하는 인물들이 빠져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누락은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베이컨은 동일한 책의 후반부 백과사전 학자들을 다룬 에세이에서 따로 논의되었다.)
-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와 켄엘름 디그비(Kenelm Digby) 역시 누락되었으며, 피에르 가상디는 에피쿠로스 원자론 복원 프로젝트가 아니라 오직 천문학 저작으로만 아주 잠깐 언급되었다.
- 반면 다른 명단에서 무시되던 16세기 위그노 자연주의자이자 도예가인 베르나르 팔리시(Bernard Palissy)는 데카르트만큼이나 긴 분량으로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노바토레스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인물을 포괄하는 ‘화학적 혁신가들’ 섹션도 길게 포함되었다.
2-7. 신구 논쟁과의 차이 및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전략
- ‘신구 요설(Querelle)’과의 엄격한 구별
- 새로움과 혁신이 논쟁의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노바토레스 논쟁(Dispute over the novatores)은 17세기 후반 프랑스를 뒤흔든 ‘신구 학예 논쟁(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과 표면적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둘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 샤를 페로의 시 Le siècle de Louis le Grand(1687)에서 촉발된 ‘신구 요설’이 문학과 문화 전반을 아우른 반면, 노바토레스 논쟁은 철저히 자연철학 영역에 국한되었다.
- 또한 고대 세계와 근대 세계 사이의 가치 경쟁이라는 구도는 노바토레스와 그 적대자들에게 부차적인 문제였다.
- 그들에게 새로움이란 오직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 과거 철학의 복원으로서의 혁신
- 일부 혁신가들이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노바토레스에게 혁신이란 곧 과거 철학과의 공명 내지는 고대 사상가의 명시적인 부활을 뜻했다.
- 즉, 노바토르가 된다는 것은 무조건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옛것을 부활시키거나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탈하는 행위였다.
- 프랜시스 베이컨의 복원 기획
- 프랜시스 베이컨은 『신기관』이나 『새로운 아틀란티스』 같은 제목에 ‘새로움’을 내세우며 아리스토텔레스 및 당대 철학 사조와의 단절을 강조했으나, 동시에 고대 그리스 사상에 대한 독특한 역사관을 피력했다.
- 그는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등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가들이 파벌을 만들지 않고 진지하고 소박하게 진리를 추구했으나, 대중의 구미에 맞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가벼운 사상가들에 의해 그들의 무거운 진리가 역사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고 보았다.
- 따라서 베이컨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 숨겨진 철학을 들추어낸 『고인의 지혜』(1609)나, 본래 ‘복원·수리’를 뜻하는 라틴어 ‘인스타우라티오’를 사용한 『위대한 복원(Instauratio magna)』을 통해 자신이 오히려 더 오래되고 실질적인 철학을 복원하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 질 베르손 드 로베르발(Gilles Personne de Roberval)의 장치
- 로베르발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지지하기 위해 고대 지혜의 권위를 동원했다.
- 그는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쓴 세계 체계에 관한 소책자(Aristarchi Samii de mundi systemate … libellus)』(1644)를 출판하며, 이것이 자신이 새로 발견하여 번역하고 주석을 단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us)의 아랍어 필사본인 것처럼 위장했다.
- 비록 당대인들이 이를 진짜 고대 문헌으로 믿지는 않았을지라도, 이 장치는 헬리오센트리즘을 아리스타르코스의 고대 지혜로 소환하는 강력한 수사학적 도구였다. (반대로 리베르투스 프로몬두스는 코페르니쿠스를 공격하기 위해 『안티-아리스타르코스』를 써서 태양중심설을 해묵은 이론의 부활일 뿐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 피에르 가상디의 에피쿠로스 복원
- 가상디는 평생을 에피쿠로스 저작의 편집과 번역에 바쳤으며, 명시적으로 현대화되고 기독교화된 에피쿠로스주의를 옹호했다.
- 가상디에게 새로운 철학이란 곧 고대 사상의 철저한 부활을 의미했다.
2-8. ‘새롭고도 오래된 철학(Philosophia Novantiqua)’의 전략들
- 야콥 토마시우스의 두 가지 분류
- 라이프니츠의 스승이자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수였던 야콥 토마시우스는 1665년 강의에서 페리파토스 학파를 공격하는 노바토레스를 두 부류, 즉 ‘리베르티니(libertini)‘와 ‘노반티쿠이(novantiqui)‘로 구별했다.
- 리베르티니는 학계의 일체의 권위적 예속을 거부하고 전적인 자유 사상을 학교에 도입하려는 이들인 반면, 노반티쿠이는 예속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군주(스승)를 바꾸려는 이들이었다.
- 즉, 고대의 다른 훌륭한 사상가들에 비해 가장 나쁜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선택하고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보고, 오랫동안 추방당해 있던 다른 고대 군주들의 영토를 부활시키려는 자들이 바로 노반티쿠이였다.
- 토마시우스는 이 노반티쿠이들이 명백한 혁신가로 낙인찍혀 기피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고대의 이름을 빌려 신장개업을 하는 것일 뿐,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보면 결국 진리 탐구가 아니라 새로움에 대한 욕망에 이끌리고 있다는 점에서 리베르티니와 다를 바 없는 혁신가의 형제들이라고 단죄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와 현대인의 화해 (르네 르 보쉬)
- 또 다른 형태의 노반티쿠이 전략은 현대의 혁신적 철학이 적절히 이해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원리와 사실상 일치함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 이는 특히 후기 데카르트주의 자연철학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 르네 르 보쉬(René Le Bossu)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 원리와 르네 데카르트 물리학 원리의 평행론(Parallele des principes de la physique d’Aristote et de celle de René Des Cartes)』(1674)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및 그의 제자 자크 로오)의 입장을 나란히 배치했다.
- 그는 두 철학이 물리학을 다루는 두 가지 필수적인 방식이자 동일한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부위일 뿐이므로, 서로 상호 보완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과 데카르트의 기계론 사이의 근본적인 불상충성은 교묘하게 함구되었다.)
- 요하네스 드 레이의 아리스토텔레스-데카르트주의
- 요하네스 드 레이는 그의 저작 『자연철학의 열쇠, 혹은 아리스토텔레스-데카르트주의적 자연 관조 입문』(1654)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데카르트의 렌즈로 읽어내려 했다.
-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고유의 모호함이 실은 스콜라 학자들이 쳐놓은 연막의 결과일 뿐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질료란 확장된 물질(extension)이고 형상이란 모양(shape)에 불과하다고 해석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를 하나로 통합했다.
- 젊은 라이프니츠의 동조
- 1668년 10월, 라이프치히의 젊은 학생이었던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스승 토마시우스에게 보낸 열정적인 편지에서 드 레이의 『자연철학의 열쇠』를 인용하며 개혁 철학(philosophia reformata)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원리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놀랍게도 갈릴레오, 베이컨, 가상디, 데카르트, 디그비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 라이프니츠는 스콜라 학자들이 도입한 왜곡을 걷어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는 연장성과 불가입성이고, 형상은 도형(figure)이며, 모든 변화는 국소 운동(local motion)으로 환원되므로 현대인들과 똑같다고 역설했다.
- 학문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던 토마시우스는 이 주장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으나, 이 기획은 노바토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사이의 경계에 놓인 독특한 회색지대를 잘 보여준다.
2-9. ‘노바토레스’라는 범주에 대한 분석적 성찰
- ‘행위자 범주’인가 ‘분석가 범주’인가
- 역사학의 표준적인 구분법에 따르면 노바토레스는 분명 당대 문헌에 빈번히 등장하는 ‘행위자 범주(actors’ category)’에 속한다.
- 그러나 당대에도 이 인물들을 하나의 학파로 묶는 것에 대한 회의론이 존재했다.
- 위트레흐트 대학교의 철학 교수이자 완고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던 헤라르두스 드 브리스는 1683년 공개 토론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철학 세계는 스콜라파(Scholastics), 자유소요학파(liberal Peripatetics), 라무스파(Ramists)라는 세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진단하면서도, 파트리치, 고를레우스, 케플러, 갈릴레오, 바송, 텔레시오, 캄파넬라, 베이컨, 길버트 등의 노바토레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보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무리가 하나의 단일한 연합을 이루어 제대로 된 종파(sect)를 형성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 공통 텍스트와 체계의 부재
- 드 브리스의 진단은 일리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아무리 견해가 달라도 『영혼에 관하여』나 『자연학』 같은 공통의 텍스트를 공유했던 반면, 노바토레스가 공유한 것은 오직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거부한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 그 외에 그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실질적 실마리는 거의 없었다. 텔레시오는 열과 냉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고, 길버트는 자석으로 설명했다. 바송, 고를레우스, 가상디는 각기 다른 변종 원자론자들이었다. 갈릴레오는 체계적인 설명 시스템을 제공하는 의미에서의 자연철학자가 전혀 아니었으며, 베이컨, 갈릴레오, 데카르트의 프로그램은 서로 완전히 달랐다.
- 따라서 이 용어는 사후 연구자를 위한 ‘분석가 범주(analysts’ category)’로 기능하기에는 정합성이 턱없이 부족하다.
- 적대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논쟁적 범주’
- 이 용어의 결정적인 특징은 1620년대에 메르센이나 프레이처럼 새로움을 반대했던 ‘적대자들’에 의해 처음 도입되고 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자신이 새로운 발견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을지언정, 노바토레스라는 그룹에 속해 있다고 자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데카르트조차 1630년 아이작 비크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뿐만 아니라 텔레시오, 캄파넬라, 브루노, 바송 같은 노바토레스들을 싸잡아 비판하며 “이 사람들 중 나에게 지혜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느냐”고 멸시를 보냈다.
- 정작 본인이 나중에 그 무리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찍히게 될 운명이었음에도 그러했음
- 표적 공격을 위한 명명식
- 결국 ‘노바토레스’는 정당성이나 학파적 정합성을 가진 범주라기보다, 아리스토텔레스 진영이 자신들의 다양한 반대자들을 하나로 인격화하여 공동의 타깃으로 삼기 위해 만들어낸 ‘논쟁적 범주(polemical category)‘였다.
- 개별적으로 보면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으나, 하나의 꼬리표를 붙여놓으면 한꺼번에 묶어서 공격하기 쉬운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 그들의 다양한 사상을 일일이 다루는 대신 “진리가 아니라 새로움과 명성만을 좇는 무리”, “종교를 위협하고 궁극적으로 사회적 혼란과 분열을 낳는 자들”로 한 번에 단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반대로 노바토레스 진영 역시 풍부하고 다채로운 스콜라 사상가들을 단순한 공격 표적으로 만들기 위해 똑같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는 논쟁적 꼬리표를 편리하게 사용했다.
2-10. 허상의 대립: 두 진영의 상호 풍자와 사회적 지형
- 노바토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충돌은 일정 부분 두 개의 ‘풍화된 허상(caricatures)’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 양측은 상대 진영의 가장 반대하기 좋은 독소 조항만을 골라내어 그것이 마치 그 그룹 전체의 진실인 양 공격을 집중했다.
- 노바토레스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진리가 아닌 전통과 권위에만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집단이었다.
-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보기에 노바토레스는 진리보다 명성과 새로움만을 좇는 오만한 자들이었다.
- 풍자 속에 숨겨진 절반의 진실
- 이러한 상호 풍자가 완전히 허구는 아니었으며,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중 일부는 지독하게 도그마적이었고 노바토레스 중 일부는 명성을 탐했다.
- 토머스 홉스는 대학에서 통용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조롱하며 그것은 철학(philosophy)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학성(Aristotelity)‘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 이에 대해 세스 워드는 홉스가 원하는 것은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학성이 ‘홉스 학성(Hobbeity)’으로 바뀌어 온 세상이 홉스 자신을 숭배하게 만드는 것뿐이라고 응수했다.
- 실제로 홉스는 『리바이어던』 결미에서 자신의 책이 주권자의 승인을 얻어 대학에서 유익하게 가르쳐지기를 희망한다고 썼으며, 데카르트 역시 자신의 철학 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대체하여 예수회 학교의 교재로 채택되기를 열망했다.
- 진영 내부의 복잡성과 학문적 개방성
- 그러나 이러한 규정이 양 진영의 전부를 대변하지는 않았다.
- 장 세실 프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 어떤 오류도 돌리기를 거부했던 극단파였던 반면, 메르센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옹호하는 저작을 쓰면서도 정작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 목록을 길게 나열할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 홉스와 데카르트 역시 명성을 좇은 면이 있으나, 그들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지식을 확장하는 데 진지하게 헌신했다는 사실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 가브리엘 다니엘 신부의 촌철살인
- 1690년 가브리엘 다니엘(Gabriel Daniel) 신부는 『데카르트 세계로의 여행(Voiage du monde de Descartes)』이라는 독특한 풍자 소설을 출판했다.
- 육체에서 분리된 데카르트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화자는 현실 세계의 철학적 지형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 데카르트 철학은 새로움이 가진 모든 장단점 속에서 출발하여 모든 새로운 교리가 겪는 운명을 마주했다. 수많은 이들이 감탄하며 그것을 포용하고 열정적으로 방어했으며 재능 있는 인물들의 보호를 받았으나, 거의 모든 대학과 공적 기관은 그것을 거부하고 배척했다. 양 진영 모두 각자의 ‘사적 이해관계(Self-interest)’에 따라 행동한 셈이었다.
- 데카르트 편에 선 자들은 자신들이 대중 무리 위로 돋보이고 진보한 존재로 식별되기를 원했고, 반대편에 선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학문적 신용과 기득권이 깎여 나갈까 두려워했다. 그러면서도 양측이 내세운 명분과 가식은 언제나 동일하게 ‘진리에 대한 사랑과 부패하지 않은 교리’였다.
2-11. 결론: 종교개혁과 과학 혁명의 평행론 및 창조 신화의 형성
- 종교개혁의 파편화 양상과의 평행론
- 16세기 유럽 기독교 공동체에 가해진 종교개혁은 트라우마적 사건이었다.
- 루터, 칼뱅, 츠빙글리 같은 거두를 필두로 수많은 개혁가가 로마의 헤게모니에 도전했으며,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루터파, 칼뱅파, 재세례파, 메노파, 퀘이커 등 서로 경쟁하는 수많은 종파로 영구히 파편화되었다.
- 로마 가톨릭교회는 생존했으나 옛 단일 체제는 붕괴했다.
- 단일 표적과 다양한 대안들
- 17세기의 이른바 과학 혁명은 지적 지형에서 일어난 개신교 종교개혁과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었다.
-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지적 개혁가들이 일제히 공격을 집중한 단 하나의 메인 표적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였다.
- 그리고 종교개혁과 똑같이, 메인 프로젝트를 무너뜨린 자리에는 노바토레스의 다양성이 보여주듯 서로 완전히 다른 수많은 대안적 강령들이 우후죽순 솟아올랐다.
- 새로운 철학과 과학의 아버지들로 명명되는 베이컨, 데카르트, 갈릴레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정통주의의 자리를 꿰차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혁신가들의 무리’가 존재했다.
-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 속에서도 살아남았듯,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학파 철학 역시 대학과 학교 현장에서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며 지속되었다.
- 정치 혁명과 과학 혁명의 차이
- 정치 혁명에서는 한 정권이 전복되면 백성들이 살아갈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하나의 안정적인 신정권으로 대체하려는 유인이 강하게 작동한다.
- 그러나 과학과 철학의 세계는 다르게 작동한다. 노바토레스 내부에는 단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경쟁하는 수많은 대체 프로그램이 존재했으며, 그들은 지배적인 스콜라 철학과 싸우는 것만큼이나 자기들끼리도 치열하게 경쟁했다.
- 이러한 경쟁은 과학과 철학에 결코 해로운 일이 아니었다. 실패한 국가나 홉스적 자연 상태에 던져진 인간은 고통받고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지만, 과학적 세계에서 상호 경쟁적인 관점들의 지적 대결은 오히려 이론을 교정하고 강화하는 요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 근대 과학 창조 신화의 형성과 왜곡
- 현대 과학과 철학에 단 한 명의 지성적 아버지가 존재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단번에 낳았다는 생각은 대중적인 통념에 불과하다.
- 실제 근대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서 벗어나 자연철학의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려 했던, 끊임없이 진화하고 다채로웠던 ‘노바토레스’의 혼란스러운 분투 속에서 시작되었다.
- 데카르트주의라는 블랙홀과 기억의 삭제
- 세기가 진행됨에 따라 한때 명예롭거나 불명예스러운 자리를 차지했던 수많은 혁신가의 명단은 점차 짧아졌고 상당수가 유행 뒤로 밀려나 잊혔다.
- 1694년 윌리엄 워턴(William Wotton)은 베이컨 경을 인류가 잘못된 길에 서 있음을 설득하려 고군분투한 첫 번째 위대한 인물로 꼽고, 그 뒤를 곧바로 데카르트가 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왕립학회의 영웅들(보일, 뉴턴, 호이겐스 등)이 등장했다는 식의 선형적 역사를 썼다.
- 가브리엘 다니엘 신부의 소설 속 인물은 데카르트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간 냉혹한 진실을 속삭였다. 데카르트가 지닌 광채는 그와 같은 시대 혹은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새로운 철학자들’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행운을 누렸다는 것이다. 스페인에서 모든 분파의 이단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루터란’이라 부르듯, 지상 세계에서는 자연철학에서 무언가 정제된 개혁을 시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무조건 ‘데카르트주의자(Cartesian)’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고 있었다.
- 이리하여 근대 과학의 창조 신화가 정립되었고, 서로 경쟁하던 노바토레스의 복잡하고 혼돈스러웠던 진짜 기원은 역사 속으로 깔끔하게 망각되었다.
3. Renaissance Aristotelianism(s)
3-1. 서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오해와 재평가
- 기존 역사학계의 왜곡된 전통적 서사
- 오랜 기간 철학사학자와 과학사학자들은 학교(Schools)에서 가르치던 단일하고 정합적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철학 체계가 존재했다고 가정했다.
- 그리고 그것이 과학 혁신에 대해 나쁘게는 적대적이었고 좋게는 무관심했다고 추정해 왔다.
- 그리스도의 신성, 성체성사, 개인의 영혼 불멸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 이론의 요소들, 특히 신학적 색채를 띤 핵심적인 형이상학적 원칙들에 대한 고수가 자연철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는 가정이 여전히 흔하게 통용되고 있다.
- 이에 따라 근대 과학의 도래는 흔히 17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 이론을 거부하고, 자연의 기계화에 적합한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질료 이론을 채택한 사건과 여전히 동일시되곤 한다.
- 이분법적 단절 서사의 한계
- 이러한 시각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부터의 단절을 다루는 전통적인 서사와 일치하며, 이 서사 속에서는 서로 배타적인 두 진영이 역사적인 권력 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 즉, 수학적 물리학과 실험을 옹호하는 기계론자들의 진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 및 종교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진영이 대립한다는 구도이다.
- 그러나 이러한 그림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르네상스를 단지 ‘과학 혁명’으로 알려진 급격한 전환의 전주곡에 불과한 것으로 상정하는 잘못된 방법론을 낳는다.
- 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복수성 복원
- 최근의 학문적 성과는 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전통을 복원하여, 이 전통이 결코 단일론적(monolithic)이지 않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나 종교적 권위에 일관되게 종속되어 있지도 않았음을 보여준다.
- 천문학과 광학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혼합 수학 과학에서의 중세적 발전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최근 연구는 운동과 혼합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 역시 후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의해 혁신적인 방식으로 발전되었음을 보여준다.
- 점진적 혁신의 간과
- 당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으로 오인되었던 『역학 문제집(Quaestiones mechanicae)』의 르네상스적 복원과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역학이 물리적 현상에 수학적 증명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 역할,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저작 연구가 의학에서의 관찰과 실험 강조에 미친 역할 등도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전통의 기여는 지진과 같은 격변이라기보다 점진적인 축적(incremental)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대부분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3-2. 영미권 연구 방법론의 결함과 학문적 지형의 파편화
- 현대적 인물 중심의 편향된 탐색
- 특히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영어권(Anglo-American)의 연구는 정전(canon)으로 대접받는 현대 사상가들의 방법론 및 교리와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에 의해 여전히 주도되고 있다.
- 이는 르네상스 텍스트를 조사할 때 오직 겉보기에 현대와 접점이 있어 보이는 지점으로만 탐색을 제한하는 ‘골라먹기식(hunt-and-peck)’ 방법론을 조장한다.
- 불균형한 지적 지형도
- 최근 들어 일부 포괄적인 연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르네상스 시기의 지적 발전에 대해 특정 연결은 과장하고 다른 연결은 간과하는, 구멍이 많고 한쪽으로 치우친(gappy and lopsided) 그림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 예를 들어, 자바렐라(Zabarella)의 ‘레그레수스(regressus, 귀환법)‘와 그것이 갈릴레오(Galileo) 및 홉스(Hobbes)의 방법론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파도바(Padua) 대학교의 영향력 권역 밖에서 생산된 방법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텍스트 연구는 거의 없다.
- 이는 홉스의 분석 및 종합 방법론을 레그레수스의 단계들과 성급하게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혼란을 야기한다.
- 원질료(Prime Matter) 해석의 누락
- 유사하게, 아리스토텔레스적 혼합 이론은 원자론이나 입자론적 질료 이론과의 관계 속에서만 연구되고 있을 뿐, 정작 핵심 개념인 원질료(prime matter)가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고 발전되었는지는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 변화는 오직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교리를 통합함으로써만 발생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 그 결과, 원질료가 형상(form)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립적(self-subsistent)이라는 견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서클 내부에서 지지가 증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통째로 간과된다.
- 기존의 선택적 방법론이 일부 진전을 이루었을지라도, 현재 지식의 상태가 이토록 구멍 나고 경사져 있기 때문에 이 전통에 대해 성급하게 일반적인 결론을 내리거나 개요를 작성하는 것은 미성숙한 일이다.
3-3.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들)’의 복잡성과 학문적 경계
- 개념적 시간대의 모호성
- 논의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는 용어를 구성하는 두 단어의 정확한 의미 자체가 분쟁 중이라는 사실이다.
- 철학에서 르네상스가 언제 있었고 그것이 무엇을 수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만약 그것이 인문주의(humanism)의 도래를 의미한다면, 르네상스는 14세기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Petrarch)와 함께 시작되어 17세기 이전에 끝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적 노력은 페트라르카 이전부터 존재했고 나중에 북유럽의 일부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므로, 이 기준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통념보다 더 오래 지속된 셈이다.
-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는 단어를 더하면 시간적 구획은 훨씬 더 흐려진다.
- 르네상스 기간 동안 인문주의의 영향과 이탈리아 내 플라톤 철학 석좌의 설치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육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확고하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 중세 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이후 학교에서 가르친 내용 사이에 존재하는 높은 수준의 연속성은, 인문주의나 플라톤주의 및 헬레니즘 철학과 주석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의 번역, 해석, 교수 방식에 영향을 주었을지언정 고대 철학의 ‘재탄생(rebirth)’을 언급하는 것을 문제적인 일로 만든다.
- 단일 교리의 부재와 회색지대
- 유럽의 대학 교육이 압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 기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연계된 단일하고 일관된 교리나 접근법 세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 상이한 우선순위를 가진 다양한 교육적 맥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대한 풍부하고 다채로운 해석과 활용을 낳았다.
- 마르코 스가르비(Marco Sgarbi)가 입증했듯 이 시기에는 스스로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고 식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자가 진술은 신뢰하기 어려우며, 스가르비와 저자(하타브)가 보여주었듯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페리파토스 학파를 명시적으로 공격한 르네상스 철학자들조차 근본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방법론과 교리를 항상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 페리파토스 학파를 격하시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정한’ 교리를 드러내려는 자와, 아리스토텔레스 전체를 거부하는 자 사이의 경계는 이처럼 흐릿하다.
- 학문적 위계와 개별적 이견
- 추가적인 혼란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학문 위계 내부의 경계에서 발생한다.
- 『역학 문제집』을 주해하며 기계 기술을 과학의 반열로 올리려던 수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Physics)』을 강의하던 자연철학자들과는 다른 문제와 씨름했고, 이 자연철학자들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종교 교리 사이의 긴장에 직면했던 신학자들과 상이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종 불명확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사상가들은 전집의 다른 구절과 교리들 사이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코퍼스 중 특정 부분의 주장과 상충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 특정 르네상스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보일지 아니면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보일지는 우리가 어떤 학문적 위계 수준과 어떤 중세적 해석을 특권화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제도적 맥락과 학문 분야에 따른 변이 외에도, 동일한 기관에서 동등한 자리를 차지한 교수진 사이에서도 의견이 불일치할 수 있는 개인적 차이가 존재했다.
- 임시적 정의의 채택
- 궁극적으로 이러한 혼란 요인들은 우리로 하여금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들(Renaissance Aristotelicanisms)‘이라는 복수형 용어를 임시로 사용하게 만들며, 추가 연구가 정립되기 전까지 그들이 공통된 핵심을 공유하는지 아니면 다른 유대로 묶여 있는지를 열어두게 한다.
- 당분간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나 동의의 정도와 상관없이, 아리스토텔레스적 텍스트와 원칙을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삼은 지식인들을 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규정한 에드워드 그랜트(Edward Grant)의 가장 광범위한 성격화를 채택하고자 한다.
3-4. 텍스트와 맥락 분석의 접근법 (Texts in Contexts)
- 전통적 단절 서사의 탈피
- 성급한 일반화와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는 부정확한 개념을 피하기 위해, 본 장의 목적은 전통적 서사가 특권화한 근대성의 특징들과 무관하게 다양한 기관 및 학문 분야에서 활동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결정적이었던 텍스트와 쟁점을 연구하는 것이다.
- 이 접근법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전통 내부의 발전에 대해 더 균형 잡히고 미묘한 그림을 제공하며, 17세기 인물, 방법론, 교리와의 더 고지된 연결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 준다.
- 세 가지 교육적 맥락의 비교
- 저자는 16세기 파도바(Padua) 대학교, 예수회(Jesuit Order), 그리고 신생 네덜란드 공화국에 설립된 레이던(Leiden) 대학교의 전신인 칼뱅주의 아카데미(Calvinist Academy)라는 세 가지 교육적 맥락을 검토한다.
- 각 맥락에서 나온 두드러진 텍스트를 중심축으로 삼아,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핵심 쟁점인 ‘실체적 생성(substantial generation)‘과 ‘원질료와 실체적 형상의 관계‘를 어떻게 다르게 취급했는지 보여 주고자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로부터의 점진적 이탈
- 이들의 취급 방식은 이븐 루시드(Averroës)의 해석을 옹호하는 입장(파도바)에서부터,
- 실체적 변화를 겪는 인공물(artifacts) 및 준(準)자립적인 부분 실체로서의 질료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해석(예수회),
- 그리고 마침내 실체적 변화와 질료형상론(hylomorphism) 자체를 전면 거부하는 입장(레이던)에 이르기까지
-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로부터 점진적으로 멀어지는 궤적을 보여준다.
- 통념과 달리, 17세기 실체 이론을 예견하는 혁신들은 파도바의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아니라 신학적 동기가 더 강했던 스콜라 저자들(예수회 및 개신교)에게서 도출된다.
3-5. 세 가지 교육적 맥락과 핵심 텍스트의 성격
- 첫 번째 텍스트: 자바렐라의 『자연학 주석』
- 자바렐라(Giacomo Zabarella)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책들에 관한 주석』은 그의 강의에 기초하여 그가 사망한 후인 1601년 베네치아에서 미완성 형태로 출간되었다.
- 학생 시절부터 교수 시절까지 평생을 파도바에서 보낸 자바렐라(1533~1589)는 처음에 논리학, 그 후에는 자연사(natural history) 교수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가르쳤다.
- 가톨릭과 개신교 유럽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논리학 및 방법론 저작으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자연학은, 이븐 루시드에게 영감을 받고 파도바 의대와 연계된 자연주의적 접근법을 대변한다. 포맷 면에서 그의 주석은 라틴어 번역본을 짧은 파트로 나누어 행간을 줄 단위로 해설하는 중세적 방식을 따르지만, 그리스어 필사본과 헬레니즘 주석가들을 대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주석보다 훨씬 더 짧은 구절로 나누어 광범위한 해설을 제공한다.
- 두 번째 텍스트: 코임브라 예수회 학부의 『자연학 주석』
- 코임브라(Coimbra) 대학교의 예수회 학부가 저술하여 ‘코임브라 주석가들(Coimbran commentators)‘로 통칭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전 8권에 관한 주석』(1594)이다.
- 이들의 주석서는 예수회 회원들이 작성한 자연철학 저작 중 가장 빈번히 인쇄되고 널리 보급된 작품이었다.
- 인문주의 학자들의 문헌학적 성과 덕분에 개선된 번역과 고지된 주석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코임브라 주석서들은 개선된 라틴어 번역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원문을 나란히 배치하여 이 요구를 충족시켰다.
- 또한 원문과 주석 뒤에 상세한 ‘질문(questions)’ 섹션을 두어 다른 고대 철학자들과 주석가들의 견해를 명확히 식별했다.
- 이 저작은 프란시스코 수아레스(Francisco Suárez)의 영향력 있는 『형이상학적 토론(Metaphysical Disputations)』(1597)이 나오기 불과 3년 전에 출간되었으므로, 수아레스의 저작과 중첩되는 내용을 함께 조명할 수 있다.
- 세 번째 텍스트: 고를레우스의 『철학적 연습』
-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 위기 시절 레이던 대학교의 비교적 무명이었던 신학도 다비드 고를레우스(David Gorlaeus, 1591~1612)가 쓴 『철학적 연습(Exercitationes philosophicae)』(1620 출판, 1610년경 작성 추정)이다.
- 그는 원자론을 주장하고 사후에 아르미니우스주의 및 소치니주의(Socinian) 이단, 그리고 데카르트주의와 연계되지 않았다면 완전히 망각되었을 인물이며, 21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가족에 의해 책이 출간되면서 악명을 얻었다.
- 이 책은 신학도들이 마스터해야 했던 스콜라 형이상학 및 자연학의 표준 주제들에 대한 학술적 연습문제(practice disputations)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시 개신교 대학 학자들이 흔히 출판하던 형태였다.
- 후기 스콜라주의의 흐름을 따라 고를레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직접 주해하지 않고, 스콜라적 주제와 질문들을 체계적으로 다룬다.
- 그의 실체적 변화 취급 방식은 주석가들과 극적으로 다른데, 흔히 그가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원자론에 밀려 그런 주장을 했다고 가정하지만, 실제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 원리 자체로부터 원자론을 논증해 낸다.
3-6. 『자연학』 1권 7장의 뼈대와 핵심 텍스트 비교
- 논쟁의 출발점이 되는 구절
- 자바렐라와 코임브라 예수회 학자들이 다룬 공통 구절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1권 7장에 속하는 부분으로, 모든 자연적 변화에는 ‘질료(matter)’, ‘형상(form)’, ‘결여(privation)’라는 세 가지 원리가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논증의 일부이다.
- 이 논증은 실체의 생성인 ‘실체적 변화’와 속성의 변화인 ‘우연적 변화(alteration)’의 구별에서 출발한다.
- 뜨거워지는 실체처럼 모든 우연적 변화에 기저 주체(subject)가 있듯이, 실체적 변화의 경우에도 반드시 기저 주체인 ‘원질료’가 있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 이 구절은 원질료와 실체적 형상의 관계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낳는 원천(locus classicus)이며, 16세기 예수회 주석서와 교과서에서는 ‘질료가 형상 없이 존재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토론하는 기회가 된다.
- 텍스트 번역의 비교 (자바렐라의 텍스트 62 vs 코임브라의 텍스트 61)
- 두 주석서의 번역문은 자구상의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면 의미상 일치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언가가 생성된다고 말할 때 표현이 다각화되는데, 단순히(simpliciter) 생성되는 것은 오직 실체뿐이다. 양, 성질, 관계, 시간, 장소 등은 어떤 기저 주체(subject)로부터 생성된다. 따라서 실체만이 기저 주체 없이 생성된다고 말해지며 다른 모든 것은 실체로부터 생성된다“고 선언한다.
- 그리고 “실체와 단순히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whatever other beings/all other things which are entirely) 역시 어떤 기저 주체로부터 생성된다는 점은 식물과 동물이 씨앗(seed)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고려해 보면 명백해진다”고 덧붙인다.
- ‘단순히 존재하는 다른 것들’에 대한 주석가들의 의문
- 두 주석가 모두 “실체와 단순히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이라는 문장이 자아내는 의문과 의심을 토론한다.
- 코임브라 주석가들의 개방적 태도
- 코임브라 주석서는 두 가지 해석을 간결하게 제시한다.
- 첫째는 고대 주석가 알렉산드로스(Alexander)의 독해로, 실체적이든 우연적이든 모든 생성물을 무차별적으로 포함하는 해석이다.
- 둘째는 (특정인을 지칭하진 않았으나) 인공물(artifacts)과 같이 단순히(simpliciter) 생성되는 다른 대상을 지칭한다는 해석이다.
- 인공물은 실체의 형상을 지니지 않지만, 이것 혹은 저것으로 생성된다고 말해지지 않으므로 ‘완전히 생성되는’ 또 다른 종류의 주체를 구성한다는 논리이다.
- 이 해석을 지지하기 위해 인공물은 그 질료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실체의 유(genus)에 속한다고 쓴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석과, 인공물을 구성하는 주체 역시 전체의 일부라고 명시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권 7장의 다른 구절이 인용된다.
- 코임브라 주석가들은 심플리키우스(Simplicius)가 첫 번째 해석을 거부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은근히 두 번째 인공물 해석 쪽으로 기운다.
- 이 독해는 향후 원질료와 실체적 형상을 신(God)에 의해 독립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불완전한 실체들로 재해석하려는 그들의 형이상학적 논증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기석이었다.
- 자바렐라의 엄격한 거부
- 반면 자바렐라는 이 구절을 접속사(“실체 ‘그리고’ 다른 것들”)가 아니라 선언적 선언(“실체, 즉 우연성을 넘어 단순히 존재하는 모든 실체들”)으로 해석한 이븐 루시드의 견해를 충실히 따른다.
- 자바렐라는 비메르카투스(Vimercatus) 등이 주장한 ‘인공물 포함 해석’을 배제하기 위해 세 가지 철학적 이유를 동원하여 인공물에 대한 어떠한 참조도 단호히 거부한다.
3-7. 자바렐라(Giacomo Zabarella)의 인공물 독해 거부와 자연주의
- 인공물 독해를 거부하는 자바렐라의 세 가지 이유
- 자바렐라(Giacomo Zabarella)는 코임브라 주석가들과 달리 『자연학』 해당 구절에 인공물이 포함된다는 해석을 전면 거부하며 세 가지 필연적인 논거를 제시했다.
- 첫 번째 이유: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절의 첫 줄에서 오직 ‘실체(substances)’만이 단순히(simpliciter) 생성되는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힌 점과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 두 번째 이유 (철학적 논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적 생성과 우연적 생성의 구별 기준을 ‘기저 주체가 명백히 드러나는가‘로 삼았다. 우연적 변화에서는 기저 주체가 현실태(in act)로 존재하며 감각할 수 있는 반면, 실체적 변화(단순한 생성)에서는 기저 주체가 감각적으로 명백하지 않고 오직 철학적 성찰을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공물은 현실태로 존재하며 감각할 수 있는 기저 주체(예: 목재)를 지니고 있으므로 명백히 우연적 생성에 속한다. 따라서 인공물은 마음 외부에서 오직 자연적 질료의 미덕 덕분에 실체나 신체로 불릴 뿐, 인공적 형상을 얻음으로써 실체와 구별되는 한 결코 단순히 존재하는 것(beings simpliciter)이라 불릴 수 없다는 결론이다.
- 세 번째 이유 (예시의 성격):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다음 문장에서 제시한 생성의 예시가 인공물이 아니라 식물과 동물이라는 자연적 실체들이 씨앗(seed)으로부터 나오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 씨앗론과 이븐 루시드(Averroës)의 옹호
- 자바렐라는 씨앗이 생성된 유기체 내부에 질료적 주체로 그대로 남아있지 않음을 강조했다.
- 그에게 씨앗이란 씨앗의 형상, 질료적 주체, 그리고 생성될 유기체 형상의 ‘결여(privation)’라는 세 가지를 의미하며, 인간의 생성을 논할 때 이 결여는 씨앗의 형상에 영구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 자바렐라는 이 과정에서 실체적 형상이 어떻게 씨앗으로부터 점진적으로 나오는가에 대한 이븐 루시드의 설명을 상세히 옹호했다.
- 씨앗 형상의 부분들이 점진적·연속적으로 물러남과 동시에 새로 생성될 형상의 부분들이 도달하여 마침내 완전해지며, 형상이 완성되는 순간 씨앗의 형상은 완전히 소멸(corrupted)한다는 논리이다.
- 이는 목재라는 기저 주체가 침대나 집이라는 결과물 속에 그대로 잔존하는 인공물의 생성 방식과 원리적으로 판이하다.
- 자바렐라의 순간적 생성론과 귀환법(Regressus)
- 바렐라는 형상이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divisible) 있다고 이븐 루시드를 해석한 이들을 반박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 인간의 생성을 예로 들어, 실체적 형상의 전면적인 도입은 단 한 순간(instant)에 이루어지므로 생성 그 자체는 운동(motion)이 아니라고 논증했다.
- 다만, 질료가 그 형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예비 과정, 즉 씨앗의 우연적 성질들이 줄어들고 새로운 유기체의 우연적 성질들이 도달하는 과정은 시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진정한 운동이자 변화이다.
- 철저한 물리학적·방법론적 관심
- 자바렐라의 주석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철저히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실체적 형상 생성 과정과 방법론적 도구인 ‘귀환법(regressus)‘에 국한되어 있다.
- 그는 감각적 효과로부터 숨겨진 원인을 찾아내는 방법론인 귀환법을 정립하면서, 『자연학』의 해당 구절을 모든 생성에는 반드시 감각 너머에 숨겨진 기저 주체(원질료)가 존재해야 함을 증명하는 귀환법의 훌륭한 사례로 취급했다.
- 자바렐라는 당대의 수학자들과 달리 기계의 작동 원리를 『분석론 후서』의 엄밀한 과학적 증명 방법론에 편입시키려 하지 않았으며, 자연적 생성과 인공적 생성을 엄격히 분리하는 자연주의적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형이상학적 혹은 논리학적 질문들은 그의 주석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 예수회와 이탈리아 자연주의의 방법론적 대립
- 크레이그 마틴(Craig Martin)이 지적했듯,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의 참된 의미를 탐구하는 작업과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탐구하는 작업을 엄격히 분리했던 자바렐라식 파도바 학파의 태도와 코임브라 예수회 학자들의 접근법은 정반대 구도를 형성했다.
- 반종교개혁의 선봉으로 설립된 예수회 내부에서 철학은 어디까지나 상위 학문인 신학을 위한 예비적 도구였기 때문이다.
- 본질 규명과 텍스트의 분리
- 그러나 신학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해서 예수회의 질료 이론이 혁신성 면에서 파도바의 자연주의에 뒤처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오히려 코임브라 주석서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문 바로 뒤에 표준적인 ‘질문(questions)’과 ‘조항(articles)’ 섹션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배치함으로써, 텍스트에 대한 언어학적 해석과 실체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독립적인 형이상학적 탐구를 명확히 분리해 내는 세련된 구조를 보여 주었다. 자바렐라가 텍스트 주해와 이븐 루시드 체계의 물리적 진실 방어를 한꺼번에 수행한 것과 대조적이다.
- 핵심 질문: 질료는 형상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가?
- 코임브라 주석가들은 『자연학』 1권을 마무리하며 총 9개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졌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여섯 번째 질문이 바로 “원질료가 신의 권능(divine power)에 의해 모든 실체적 형상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불가능한가?“이다.
- 전통적 토마스주의(Thomism)와의 단절
- 이 질문의 1조에서는 형상 없는 질료의 독립 존속을 부정하는 다수파(토마스주의)의 논거 7가지와 긍정파의 논거 3가지를 공평하게 나열했다. 그러나 2조와 3조를 거치며 주석가들은 전통적인 토마스주의 견해를 반박하고, “질료는 신의 권능에 의해 그 어떤 실체적 형상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속할 수 있다”는 단호한 긍정적 결론을 내렸다. 이는 예수회가 공식 교육 지침인 『학사규정(Ratio studiorum)』을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사수하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의 논리적 필연성을 위해 과감히 정통 교리 체계와 단절했음을 보여 준다.
- 이 결론은 후일 프란시스코 수아레스(Francisco Suárez)가 『형이상학적 토론』에서 원질료를 ‘그 자체로 존재론적 실재성을 지닌 불완전한 실체’로 규정하는 논리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3-9. 예수회 주석가들의 이론 형이상학적 논거들
- 성체성사(Eucharist)를 통한 유비적 논증
- 코임브라 주석가들은 형상 없는 질료의 독립적 존속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가톨릭의 핵심 신비인 성체성사의 원리를 형이상학적 무기로 소환했다. 논증의 뼈대는 선후 관계에 기반한다. 본질적으로 우연성(accident)은 실체보다 후차적(posterior)인 반면, 질료는 형상보다 선차적(prior)인 원리이다. 따라서 후차적인 우연성이 실체에 의존하는 정도는 선차적인 질료가 형상에 의존하는 정도보다 훨씬 커야 한다.
- 그런데 가톨릭 신학은 성체성사에서 신이 실체를 결여한 채 우연성(면병의 양과 성질)만을 독립적으로 기적적으로 보존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덜 의존적인 원리인 질료를 신이 형상 없이 홀로 존재하게 보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히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신은 형상이 질료를 실현할 때 부여하는 결합적 현실태보다 더 거대한 초자연적 협력(concurrence)을 직접 제공함으로써 질료를 형상 없이 창조하고 유지할 수 있다.
- 순수 잠재태(Pure Potency) 개념의 근본적 개정
-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형이상학 체계에서 질료는 ‘순수 잠재태(pure potency)’이고 형상은 ‘현실태(act)’이다. 사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실태여야 하므로, 형상 없는 질료가 존재한다는 것은 ‘형상(현실태) 없는 현실태’라는 치명적인 논리적 모순을 낳는다. 전통 토마스주의자들은 질료가 모든 존재의 현실태를 오직 형상으로부터만 얻는다고 보았기에 이 모순을 피해갈 수 없었다.
- 코임브라 주석가들과 수아레스는 이 완고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잠재태와 현실태의 관계’라는 핵심 형이상학 교리를 내부에서부터 완전히 개정해버렸다.
- 개별적 본질(Essence)과 정적(Static) 물질관으로의 이행
- 이들은 존재(existence)와 본질(essence)의 관계를 다루는 존 던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등의 후기 스콜라 교리를 도입하여, 질료 역시 다른 모든 개별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고유하고 개별적인 본질적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 본질을 지닌 사물은 존재와 단지 양태적 차이(modal distinction)만을 지니므로, 개별적 본질을 지닌 원질료는 당연히 고유한 독립적 존재성(proper existence)을 지닌다.
- 질료형상론의 해체와 근대적 이중론의 예견
- 이 개정을 통해 원질료는 더 이상 형상(현실태)과의 역동적인 상대적 관계 속에서만 정의되는 모호한 잠재태가 아니라, 형상 없이도 신에 의해 존재 내에 보존될 수 있는 ‘확고하고 구체적인 무언가(a definite something)’로 변모했다. 질료와 형상이 매 단계마다 잠재태를 실현하며 긴밀하게 협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 이론의 역동적 성격은 여기서 완전히 상실된다. 대신 원질료라는 독립적인 불완전한 실체와 실체적 형상이라는 또 다른 독립적인 불완전한 실체가 외부에서 이진법적으로 결합하는 매우 정적(static)인 물질관으로 이행하게 된다.
- 이러한 대담한 형이상학적 혁신은 근대 과학의 자극이 아니라 철저히 스콜라 내부의 신학적·논리적 요청에 의해 일어났으며, 형식 원인(formal causation)의 지위를 격하시킴으로써 후일 물질 원인과 작용 원인만을 남기고 정신과 물질을 독립된 실체로 분리한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실체 이원론을 형이상학적 밑바닥에서부터 강력하게 예견해 주었다.
3-10. 다비드 고를레우스(David Gorlaeus)의 사상적 배경과 신학적 특징
- 체계적 논의로의 전향
- 네덜란드 레이던(Leiden) 대학교의 신학도였던 다비드 고를레우스(David Gorlaeus)의 『철학적 연습(Exercitationes philosophicae)』은 앞선 주석가들의 저작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 얽매이지 않고 학술적 주제들을 독립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다.
- 개신교 신학적 정체성의 강화
- 고를레우스의 저작은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 첫째는 개신교(Protestant) 저자로서 자신의 철학적 결론을 신학적 이유와 보다 명시적으로 연결한다는 점이다.
- 둘째는 질료형상론과 실체적 변화(substantial change) 자체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원자론적(atomist) 자연철학을 도출해 낸다는 점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적 기반 위에 선 원자론
- 놀랍게도 고를레우스의 질료 이론은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신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 원칙들 위에서 엄밀하게 확립된다.
- 그의 원자론을 뒷받침하는 우연성과 양태(modes) 이론은 당시 네덜란드 칼뱅주의 대학에 널리 채택되어 있던 표준적인 칼뱅주의 스콜라 형이상학 교과서의 도해들과 완벽히 일치한다.
- 연장성과 신체적 실체의 동일시
- 장 칼뱅(John Calvin)의 성체성사 교리를 확신했던 다른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를레우스에게도 기하학적·양적 특징들은 실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실재적 우연성(real accidents)’이 아니라 신체와 분리 불가능한 ‘양태(modes)’였다.
- 신체(bodies)는 본질적으로 양(quanta) 자체이며, 신체적 실체와 그것의 삼차원적 연장성(길이, 너비, 깊이) 사이에는 오직 이성적·개념적 구별(conceptual distinction)만이 존재할 뿐이다.
3-11. 실체적 변화 거부와 원자론의 형이상학적 도출
고를레우스가 원자론을 정립하기 위해 실체적 변화에 대항하여 펼친 핵심 형이상학적 논증의 뼈대는 세 가지 아리스토텔레스적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 존재론적 전제: 실재적 존재(a real being)란 그 본질(essence)이 그 자체로(per se) 존재하는 대상을 뜻한다.
- 개별성 전제: 모든 실재적 존재는 타인과 구별되는 고유한 ‘수적 단일성(a numerical unity)’을 지닌다.
- 결합 전제 (암묵적 전제): 허구적인 가상의 전체와 구별되는 ‘실재적 전체(real wholes)’는 그 자체로 실재적 존재인 부분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 질료형상론의 논리적 모순 규명
- 대전제 (1)에 의하면, 실재하는 사물은 그것을 그 사물이게끔 만드는 고유한 본질에 의해 다른 사물과 구별된다. 따라서 자신만의 본질을 가진 대상이 다른 본질을 가진 대상과 본질적으로 같아지려면 오직 ‘본질적 변형(essential transmutation)’, 즉 자신의 본질을 버리고 상대의 본질을 취하는 방식 외에는 불가능하다.
- 단일한 실체의 파괴
- 전제 (2)와 (3)에 입각할 때, 만약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주장대로 복합 실체가 원질료와 실체적 형상의 결합물이라면, 이 부분들(원질료와 형상) 역시 실재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 내에서는 쪼개질 수 없고 다른 존재로부터는 분리될 수 있는 독립된 성격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원질료와 실체적 형상은 각자 고유하고 상이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두 부분이 결합하여 완전히 똑같은 하나가 되는 것은 본질적 변형 없이는 불가능하다.
- 복합 실체의 실체성 박탈
- 하지만 정작 Peripatetics(페리파토스 학파)주의자들은 개별 실체가 하나의 전체로 결합할 때 그 구성 부분들인 원질료와 형상이 본질적으로 변형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에 의해, 결합의 결과물로 나온 복합 실체가 진정한 의미의 ‘수적 단일성’을 획득했음을 부정해야만 한다. 결국 질료형상론이 말하는 복합 실체는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실재하고 별개이며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부분들이 임시로 모여 있는 ‘집합체(an aggregate)’에 불과하다는 웅장한 논리적 파탄에 직면한다.
- 물리적 분할(Division)의 재정의와 원자의 도출
- 고를레우스는 신체적 실체가 단순한aggregation(집합체)의 허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기저에 반드시 그 자체로 실재적 존재인 ‘단일하고 분할 불가능한 부분들’을 지녀야만 한다고 추론했다. 그는 “실재하는 모든 것은 분할 불가능하다”고 규정했다. 고를레우스는 분할(division)의 개념을 사물이 공간적으로 서로 격리되는 ‘상호 격리(mutual segregation)’로 재정의했으며, 분할된 양측의 사물은 분리된 후에도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한다고 보았다. 만약 상호 격리로 정의되는 분할이 실재하는 사물(res)을 아예 없는 것(nothing)으로 축소할 수 있다면, 역으로 신의 창조 행위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아니라 단지 두 사물을 결합하는 구성(composition) 행위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 자연적 변화의 전면적 우연화
- 이러한 결론은 신학적으로 명백한 모순(absurd)이므로, 물리적 분할은 이전에 결합해 있던 대상을 공간적으로 분리할 뿐이며 결합해 있던 사물 자체를 비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따라서 고를레우스에게 자연의 생성과 소멸이란 물질적 원자(atoms)들이 공간적으로 결합하고 분리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원자들의 결합에 의해 형성된 전체(wholes)는 존재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라, 단지 우연적인 존재 혹은 ‘공존(coexistences)’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실체적 변화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자연적 변화는 철저히 ‘우연적 변화(accidental change)’일 뿐이다.
- 고를레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과 단일성 교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결과, 역설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완전히 파괴하고 원자론 물질관에 도달하는 대담한 사상적 이행을 완성했다.
3-12. 결론 (Conclusion)
- 과학 혁명에 관한 과거의 고전적 연구들은 근대 신과학이 종교 교리의 요구에 전적으로 영합해 있던 거대하고 단일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정통파(orthodoxy)와의 적대적 대항 속에서 출현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실체적 변화를 다룬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구체적인 사례들은 기본 형이상학 원칙들이 자연철학적 질문에 해석되고 적용되는 방식이 교육적·제도적 맥락에 따라 극적으로 다양했음을 증명한다.
- 내부적 전복을 이끈 스콜라 신학자들
- 흔히 생각하는 통념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 이론의 생존에 가장 치명적인 위협을 가한 것은 자바렐라(Giacomo Zabarella)와 같은 파도바 학파의 자연주의적·이븐 루시드적 접근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학적 동기에 깊게 지배당했던 예수회 교과서 저자들이 내부적으로 원질료와 형상의 위상을 독립적인 독립 실체들로 쪼개놓음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이론을 안에서부터 가장 혁신적으로 변화시키고 붕괴시켰다.
-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 낳은 근대적 물질관
- 마지막으로 개신교도 사상가로서 가장 명시적이고 철저하게 신학적 논거를 동원했던 고를레우스(David Gorlaeus)의 사례는, 근대의 새로운 질료 이론들이 오직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도그마의 외부 자극으로만 탄생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준다. 고를레우스와 같은 혁신가들은 신의 창조 세계와 더 잘 부합하는 대체 물리 원리(원자)를 도출하기 위해,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와 뼈대 위에서 논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 과학 혁명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진 빚
- 비록 현재 학계의 파편화된 연구 상태로 인해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전체에 대한 단일한 일반적 캐릭터화를 내리는 것은 여전히 시기상조일지라도, 우리는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결코 균일하지도 정체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17세기의 과학 혁명은 그 중심 무대에서 활동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기존 역사학계가 인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심오한 지적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4. What To Do With the Mechanical Philosophy?
4-1. 기계론적 철학의 정의와 설명적 범위
- 기계론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
- 기계론적 철학은 일차적으로 모든 물리적 현상을 서로 다른 크기, 모양, 운동을 가진 미세한 입자(코퍼스클, corpuscles)들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환원주의로 정의된다.
- 기존 자연관과의 대립
- 이는 당대 자연철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자연관뿐만 아니라 자연주의, 헤르메스주의, 신비주의, 오컬트, 파라셀수스주의, 연금술적 설명 등과 대비되는 통일된 자연관을 제공했다.
- 방대한 설명 영역
- 초기 근대 자연철학자들은 중력, 자성, 화학 작용, 포도 발효, 무지개 색상, 혈액 순환, 심장 운동, 동물 발달 등 거의 모든 종류의 현상에 기계론적 설명을 고안했다.
- 나아가 성체변화(transubstantiation)와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나, 상처에 작용하는 동감 화약, 지상사에 미치는 별의 영향, 수맥탐지기를 이용한 도둑 식별 등 오늘날 초자연적 현상으로 분류되는 영역까지 기계론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4-2. 역사학계의 대립되는 두 가지 내러티브
기계론적 철학의 방대한 설명적 시도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내놓았다.
- 마리 보아스(Marie Boas)의 연속적 내러티브
- 보아스는 초기 근대 기계론적 철학을 “원자를 작동시키는 과정”으로 규정했다.
-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고대 원자론을 부활시켰고, 로버트 보일이 이들의 존재론적 프로그램에 실험적 방법을 접목했으며, 아이작 뉴턴이 선행 업적들을 수학적 법칙으로 연결했다고 보았다.
- 즉, 물질과 운동의 존재론이 자연에 대한 실험적 탐구 및 수학적 지식 표현과 직결된다는 입장이다.
- 에두아르 얀 데이크스테르하위스(E.J. Dijksterhuis)와 리처드 웨스트폴(Richard Westfall)의 비판
- 반면 데이크스테르하위스는 핵심 요인이 기계의 존재론이 아니라 ‘수학화된 운동 과학‘에 있다고 보고, 세계상의 ‘기계화’보다는 ‘수학화‘라고 불러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 웨스트폴 역시 자연을 거대한 기계로 보는 입자론적 전통과 역학 및 수학화된 과학에서 발전한 플라톤-피타고라스 전통을 대비시키며, 데카르트 등이 상상 속의 기계적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데 몰두하여 화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모호한 교리를 영속시켰다고 엄하게 비판했다.
- 뉴턴은 결국 이 두 갈등하는 전통 사이의 긴장을 해결해야 했다.
4-3. 최근 30년간의 해체와 현대적 비판
최근 30년 동안의 비판적 역사 서술은 기계론적 철학이 적절한 역사적 범주라는 믿음과 그것이 과학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는 확신을 모두 해체했다.
- 기술적(Descriptive) 의미의 상실
- 미시적 사례 연구와 행위자 중심(emic) 범주를 중시하게 되면서 기계론적 철학이라는 범주가 실질적인 기술적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 실제 근대 초기 자연철학자들의 입장은 매우 복잡하여 기계론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연금술사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긋기 어렵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자론자나 연금술과 입자론을 연결한 인물들이 존재했다.
- 기계론자들 내부의 다양성과 개념적 모호성
- ‘기계론자’로 묶이는 인물들의 철학적 입장도 제각각이었다.
-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확실성을 추구했으나 마랭 메르센은 완화된 회의주의를 발전시켰고, 레지는 동물을 순수한 기계로 보았으나 페로는 동물에게 지향적 영혼이 있다고 보았다.
- 보일은 감각적 성질을 기계적 속성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낙관했으나 존 로크의 인식론은 이를 거부했다.
- 또한 기계론적 철학의 정의를 입자론적 환원주의로만 볼 것인지, 생명과 영혼의 배제, 자연물과 인공물 경계의 폐지, 원격 작용의 불가능성, 목적인의 거부,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개념적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 과학 발전에 대한 영향력 의문(평가적 측면)
- 기계론적 철학이 새로운 과학의 발전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이브 쟁그라는 뉴턴이 현상을 수학화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설명이 된다고 봄으로써 설명의 개념을 바꾸었으며, 수학화가 기계론적 설명에 등장하는 물질들을 오히려 지워 버렸다고 보았다.
- 안토니오 클레리쿠지오는 보일이 화학을 기계론에 종속시키지 않았으며 그의 입자들은 기계적 성질이 아닌 화학적 성질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 앨런 찰머스는 보일의 실험적 성공이 기계론적 철학에 대한 충성 때문이 아니라 충성에도 ‘불구하고’ 성취된 것이라며, 둘의 결합을 ‘자연에 반하는 연합’으로 묘사했다. 결국 기계론적 철학은 과학적 실천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학적 메타 담론으로서의 맥락적 가치만을 가질 뿐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4-4. ‘기계론적 철학’이라는 용어의 사용 양상과 변천
- 로버트 보일의 명명과 유래
- 1650년대 후반 로버트 보일이 집필하여 1661년 발표한 논고의 서문은 이 용어의 출발점을 보여 준다.
- 보일은 데카르트주의적 가설과 원자론적 가설이 모두 물질과 국소적 운동을 통해 자연현상을 명료하게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철학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그는 이를 입자들의 결합을 강조하는 ‘입자 철학(Corpuscular philosophy)’, 혹은 기계 장치와 유사한 작용을 강조하는 ‘기계론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 등으로 명명했다.
- 만년의 저서(1690)에서도 그는 당대 지식인들의 철학을 일컫는 다양한 형용사들을 나열하면서 ‘입자론적’과 ‘기계론적’이라는 표현을 사실상 유의어로 사용했다.
- 논쟁적·모욕적 언사로서의 초기 용례
- 보일의 대중화 이전인 1660년 이전에는 이 용어가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학자 유베르 프루아드몽(Libert Froidmont)은 데카르트의 기상학 및 굴절광학 이론을 접한 뒤, 자연학이 인공적인 기계 장치를 다루는 하위 수학 지식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며 데카르트의 이론을 “지나치게 조잡하고 기계적(nimis crassa et mechanica)”이라고 비난했다.
- 헨리 모어(Henry More) 역시 데카르트를 기계론적 가설의 참칭자라고 공격하며 거부감을 표했다.
- 데카르트의 수용과 반전
- 데카르트는 오히려 이 ‘기계적’이라는 표현을 명예로운 훈장처럼 받아들였다.
- 그는 자신의 철학이 형상, 크기, 운동을 다루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명백하고 확실하다고 확언하며, 아리스토텔레스적 구분을 거부하고 물리학과 역학(mechanics)의 동등성을 주장했다.
- 영국에서의 대중화와 실험 철학과의 결합
- 영국에서는 보일과 그 적대자였던 헨리 모어의 격렬한 논쟁을 거쳐 이 용어가 널리 퍼졌다.
- 특히 헨리 파워, 로버트 후크, 새뮤얼 파커 등은 말재주에 의존하는 기존 학풍에 맞서 ‘실험 철학’과 ‘기계론적 철학’을 나란히 묶어 사용했다.
- 당시 영어에서 ‘기계적(mechanical)’이라는 단어는 기계 장치뿐만 아니라 손노동, 실용적 기술, 장인의 도구 및 구체적 작업과도 연결되었기 때문에 실험적 실천과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다.
- 반면 ‘입자론적’이나 ‘원자론적’이라는 표현은 실험적이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어 쓰이지 않았다.
- 유럽 대륙에서의 독자적 양상과 라이프니츠
- 유럽 대륙에서는 물질과 운동을 중시하는 학자들조차 이 용어를 자주 쓰지 않았으며 실험과 결합하지도 않았다.
-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초기 저작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근대론자’나 ‘새로운 철학자’의 유산으로 보았을 뿐, 영국 학자들을 언급할 때만 ‘입자론자’라는 용어를 썼다.
- 1670년대 말 이후 라이프니츠는 기계론적 철학을 운동 법칙을 정립하는 기하학적 과학(역학)과 결합시켜 이해했으며, 이는 실험적 속성보다는 수학적 증명의 필연성을 함의했다.
- 폰트넬의 해석
- 베르나르 르 보비에 드 폰트넬(Bernard Le Bovier de Fontenelle) 역시 자연 현상을 접촉 작용으로 움직이는 기계에 비유하며 기계론적 철학이 ‘명료한 관념(형상과 운동)’만을 수용하는 철학이라고 칭송했다.
- 범주의 역사적 유효성
- 다니엘 가버는 데카르트, 홉스, 가상디 등을 paradigm을 공유하기보다 각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대체하려 경쟁했던 ‘새로운 철학자(novatores)’로 보아야 하며, 보일의 대중화 이후에야 비로소 공통의 틀이 안착되었다고 보았다.
- 그러나 용어의 인위적 사용 여부를 떠나, 물리적 현상을 물질과 운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이미 존재했으므로 연구자들은 이 범주를 초기 근대의 광범위한 환원주의 흐름을 지칭하는 유용한 학술적(etic) 도구로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다.
4-5. 세 가지 역사적 논쟁을 통한 기계론적 철학의 다양성 분석
기계론적 철학이라는 범주가 너무 포괄적이어서 무의미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기계론자들이 대립 세력과 벌인 세 가지 구체적 controversies를 분석하여 그 내부의 사상적 다양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① 데카르트 대 플렘피우스 (심장의 운동 논쟁)
- 논쟁의 배경
- 데카르트는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의 혈액 순환 발견을 극찬했으나, 심장의 운동 원인에 대해서는 하비와 의견을 달리했다.
- 데카르트는 심장 내부의 극심한 열(빛 없는 불)에 의해 혈액이 팽창하고 팽창된 혈액이 혈관으로 밀려 나가는 필연적인 운동의 연쇄 과정으로 심장의 박동을 설명했다. 이는 태엽과 톱니바퀴의 배치에 따라 시계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필연적 메커니즘이었다.
- 플렘피우스의 반론과 데카르트의 파르시모니(Parsimony, 절약) 원리
- 루뱅의 의학 교수 보피스쿠스 포르투나투스 플렘피우스(Vopiscus Fortunatus Plempius)는 갈레노스와 하비의 전통을 따라 심장이 영혼의 ‘활력적 능력(vital faculty)‘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다. 몸에서 떼어낸 심장 조각이 피가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뛰는 현상이 그 증거로 제시되었다.
-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잔류 혈액의 미세한 발효와 세포 조직의 확장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기계론적 운동만으로 생리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영혼이나 불확실한 능력과 같은 불필요한 존재론적 개체를 가정할 필요가 없다는 존재론적 절약 원리를 내세웠다.
- 명료성의 요구
- 데카르트는 하비가 심장의 수축 능력을 원인으로 상정하면서 정작 수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밝히지 못한 점을 비판했다. 정작 설명해야 할 대상(explanandum)을 설명의 도구(explanans)로 삼는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이다.
- 데카르트에게 기계론적 설명이란 심장의 구조와 열에 의해 유도되는 필연적 운동의 결합이자 정합적이고 명료한 체계였다.
- 구조적 설명의 특징
- 여기서 주목할 점은 데카르트의 설명이 원자적 입자로의 직접적 환원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살점, 모공, 섬유질과 같은 상위 수준의 개체와 구조적 인과 관계를 활용한 ‘구조적 설명(structural explanation)‘이라는 사실이다.
- 운동 법칙 자체가 현상을 곧바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신체 구조의 특수성에 기계적 법칙이 결합되어 작동하는 방식이다.
② 보일 대 모어 (공기의 탄성 논쟁)
- 보일의 입자 프로그램
- 로버트 보일은 『입자 철학에 따른 형상과 성질의 기원』(1666)에서 물리 세계가 입자(corpuscles)들의 결합체인 ‘조직(texture)’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 인간이 느끼는 감각적 성질과 형상은 이 조직이 감각 기관에 주는 인상에 불과하며, 모든 물리적 변화는 물질의 운동에 의한 조직의 변화로 환원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 공기 탄성에 대한 유보적 태도
- 그러나 보일은 『공기의 탄성과 그 효과에 관한 새로운 물리-기계 실험』(1660)에서 공기에 탄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명시하면서도, 그것이 공기 입자 자체의 복원력 구조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을 둘러싼 미세 물질의 요동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리지 않았다. 즉, 인과적 메커니즘을 완벽히 규명하기보다 실험적 사실의 제시에 집중했다.
- 헨리 모어의 비판과 자연의 영혼
- 헨리 모어는 기계론적 설명의 한계를 증명함으로써 영적인 존재를 입증하고자 했다.
- 보일의 진공 펌프 실험에서 강력한 흡입력으로 100파운드의 무게를 들어 올리는 현상에 대해, 모어는 만약 보일의 말대로 공기 자체에 그런 강력한 탄성이 있다면 버터 덩어리를 짓눌러 즙을 짜내야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 현상은 기계적 탄성이 아닌 비물질적 원리인 ‘자연의 영혼(Spirit of Nature)‘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 기계론적 설명의 개념 확장
- 이에 대해 보일은 『유체정역학 담론』(1672)에서 아르키메데스와 스테빈이 중력의 궁극적 원인을 묻지 않고도 유체역학을 발전시켰음을 지적했다.
- 보일은 원래 입자의 미세 구조로 환원되는 것만을 기계론으로 보았던 초기 입장과 달리, 이제는 실험적으로 확인된 기계적 성질(무게, 탄성 등)을 매개로 현상을 설명하는 것도 ‘기계론적 설명’에 포함된다고 주장을 확장했다.
- 중간 설명(Intermediate explanations)
- 보일은 물질의 가장 원초적인 속성(크기, 모양, 운동)으로 완벽하게 환원하는 ‘근본적 설명‘과, 완전히 환원되지는 않았으나 실험적으로 친숙한 성질(밀도, 탄성, 중력 등)을 바탕으로 현상을 도출하는 ‘중간 설명‘을 구분했다.
- 버터가 짓눌리지 않는 것은 유체 내부의 압력이 모든 방향에서 균일하게 작용한다는 유체정역학적 성질로 설명되며, 이러한 중간 설명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나 모어의 신비주의적 접근을 배제하면서도 실험 과학의 유용성을 확보하는 핵심 도구였다.
③ 하위헌스, 라이프니츠 대 뉴턴 (만유인력 논쟁)
- 뉴턴의 역학적 원리
- 아이작 뉴턴은 『프린키피아』(1687)에서 천체 현상으로부터 중력을 유도하고, 이 힘으로부터 다시 천체의 운동을 도출하는 수학적 성과를 거두었다.
- 뉴턴이 말한 ‘기계적 원리(mechanical principles)‘는 입자론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기하학적 정밀함을 지닌 힘과 운동의 수학적 과학을 의미했다.
- 뉴턴은 인력의 물리적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수학적, 실험적으로 존재한다는 ‘분업적 접근’을 취했다.
- 하위헌스의 기계론적 반발
-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는 데카르트의 소용돌이(vortex) 이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뉴턴의 인력 개념은 물질의 접촉과 충돌이라는 “기계적·수학적 원리”를 벗어난 불합리한 개념이라고 비판했다.
- 그는 중력의 인과적 메커니즘을 시각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물을 채운 회전 용기 속에 실재하는 물질을 넣고 돌리는 실험을 고안했다. 미세 물질의 원운동이 중심 방향으로의 구심력을 낳는다는 점을 증명하고, 이를 원심력 법칙과 결합하여 미세 물질의 속도를 계산해 냄으로써 ‘명료하고 이해 가능한 중력의 기계적 원인’을 완성하고자 했다.
-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딜레마
- 라이프니츠 역시 뉴턴의 인력을 메커니즘이 결여된 신비롭고 “설명 불가능한 영적 능력(occult quality)“이라며 강하게 거부했다.
- 1710년대에 이르러 두 진영은 명확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인력은 실험적으로 입증되나 역학적으로 이해 불가능하며, 미세 물질 소용돌이는 실험적으로 확인되지 않으나 역학적으로 명료하다‘는 딜레마였다.
- 라이프니츠는 기계적 매개 없는 법칙은 허구라며 후자를 택했고, 뉴턴은 실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미세 물질 가설이야말로 헛된 꿈이자 허구(hypotheses non fingo)라며 전자를 택했다.
4-6. 기계론적 설명에 대한 현대적 평가와 대안적 모델
- 취약한 기계론적 설명들의 한계
- 화학이나 기상학 분야에서 입자의 모양과 현상을 무리하게 연결했던 설명들(예: 가상디의 갈고리 모양의 자성 입자, 레메리의 모공을 찌르는 뾰족한 산성 입자, 보일의 스프링 모양 공기 입자 등)은 분명 정밀한 검증이 결여된 인식론적으로 취약한 가설들이었다.
- 물리학 중심주의의 탈피와 생물학 모델
- 하지만 기계론적 철학이 과학 발전에 기여한 바를 온전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수학적 법칙과 방정식만을 과학의 유일한 전형으로 삼는 물리학 중심의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다.
- 현대 과학에서도 메커니즘을 중시하는 ‘생물학’을 모델로 삼으면 초기 근대의 기계론적 설명이 지닌 인지적 유용성이 명확해진다.
- 구조적 설명(Structural Explanation)의 재평가
- 근대 초기 해부학, 생리학, 의학(예: 데카르트의 심장 운동, 보렐리의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 등)에서 나타난 복잡한 유기체 설명은 단순한 입자 환원이 아니라 움직이는 구조들의 상호 관계를 다루는 ‘구조적 설명‘이었다.
- 기계를 부품으로 분해하여 전체 안에서 각 부품의 기능을 이해하듯, 구조적 설명은 동물 유기체의 기능적 정체성과 통일성을 인과적으로 규명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 종합적 결론
- 기계론적 철학 내부에는 입자론적 환원, 구조적 메커니즘 분석, 그리고 정량화된 운동 법칙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공존했다.
- 새뮤얼 파커의 지적처럼 기계론적 철학이 당대 학자들에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것이 즉각적인 절대적 확실성을 제공해서라기보다는, 탐구자들에게 자연의 숨겨진 과정을 추적하고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론적 경로’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5. The Later Sects: Cartesians, Gassendists, Leibnizians, and Newtonians
초기 근대 과학의 변혁은 개별적인 이론과 실천을 넘어 학파와 진영의 재편으로 이어졌다.
- 1660년 무렵에 이르러 초기 혁신가들(novatores)의 명단은 대폭 줄어들었고, 그 자리를 새로운 거장들과 이들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조직된 학파들이 채웠다.
- 이 시기에는 데카르트주의자(Cartesians) 대 가상디주의자(Gassendists), 뉴턴주의자(Newtonians) 대 라이프니츠주의자(Leibnizians)라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 이 학파들의 구성원들이 모두 완전하고 일관된 체계적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른 것은 아니었으며, 특정 학파에 속함을 선언하는 것은 종종 대립하는 상대방에 대한 반대의 표식(예: 가상디주의자라는 것은 단순히 데카르트주의자가 아님을 의미)이기도 했다.
5-1. 1660년 이전의 철학 학파들과 ‘종파/학파(Sect)’ 개념의 변천
- 초기 종파/학파 범주의 적용
- 스토아학파(Stoics), 아리스토텔레스학파(Aristotelians), 피론학파(Pyrrhonians),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s) 등 고대의 학파 외에도, 17세기 전반기에는 당대의 새로운 사상적 흐름을 분류하기 위해 ‘종파/학파(sect)‘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 하인리히 알스테드(Heinrich Alsted)는 『조화로운 물리학 체계(Systema physicae harmonicae)』(1612년)에서 네 가지 주요 학파로 모세/기독교 학파, 유대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화학 학파를 제시했다.
- 장 크리소스톰 마녠(Jean Chrysostome Magnen)은 『되살아난 데모크리토스 또는 원자에 관하여(Democritus reviviscens sive de atomis)』(1646년)에서 철학적 자유를 주장하는 새로운 학파들(세바스티앙 바송(Sébastien Basson), 톰마소 카스파넬라(Tommaso Campanella), 로버트 플러드(Robert Fludd), 오스발트 크롤리우스(Oswald Crollius),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크리스토프 샤이너(Christoph Scheiner))과 고대 철학을 부활시키려는 학파들(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피치노(Marsilio Ficino) 등)로 분류했다.
- 월터 찰턴(Walter Charleton)의 분류와 인식론적 전환
- 피에르 가상디(Pierre Gassendi)의 추종자이자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원이었던 찰턴은 『에피쿠로스-가상디-찰턴 자연학(Physiologia Epicuro-Gassendo-Charltoniana)』(1654년)에서 학파들을 네 부류로 나누었다.
- 페단트/여성 학파(pedants / Female Sect): 첫 저자에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집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대표적이다.
- 철학적 자유의 옹호자(assertors of philosophical liberty): 권위를 거부하고 자신의 지적 능력을 신뢰하는 이들로 브라헤(Tycho Brahe), 케플러, 갈릴레오, 샤이너, 키르허(Athanasius Kircher), 하비(William Harvey), 그리고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포함된다.
- 혁신가/수복가(renovators): 근대의 성과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주로 고대의 유산을 탐구하는 이들로 피치노, 코페르니쿠스, 마녠, 메르센(Marin Mersenne), 가상디가 속한다.
- 절충주의 학파(eclectics / Electing Sect): 찰턴 자신을 포함해 다니엘 세네르트(Daniel Sennert), 장 페르넬(Jean Fernel) 등이 속한 학파이다. 이들은 어떤 권위도 숭배하지 않고 고대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으며, 이성과 신실한 실험의 시험을 거쳐 가장 진리에 부합하는 방법과 원리만을 선택(cull and select)한다.
- 학파 다원주의에 대한 신학적 해석
- 찰턴은 학파의 난립을 지적 활력의 징후가 아닌,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재앙으로 보았다.
- 그는 학파가 갈라지는 근본 원인을 인간의 통제되지 않은 호기심(Curiosity)에서 찾았으며, 이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이라는 원죄(original sin)와 연결 지었다.
- 따라서 철학적 학파의 다원성을 극복하는 것은 구원(redemption)의 길로 여겨지기도 했다.
- 결국 1650년대에 이르러 수많은 프로그램이 도태되고 데카르트와 가상디라는 두 거장의 이론이 자연철학의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5-2. 데카르트주의자들과 가상디주의자들: 프랑스적 맥락
- 사회적·제도적 배경의 차이
- 17세기 중반 파리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아카데미(카비네 뒤퓌(Cabinet Dupuy), 아카데미 몽모르(Académie Montmor), 아카데미 테브노(Académie Thévenot))들은 실험과 비교조적 토론을 장려하여 가상디주의적 아이디어가 확산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 질 드 로네(Gilles de Launay)의 강연(1656년~)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에 맞서 가상디의 사상을 지지했다.
- 반면 쟈크 로오(Jacques Rohault)의 강연은 실험적 데카르트주의 물리학을 전파했고 프랑스의 살롱 문화는 데카르트 철학을 고양했다.
- 프랑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 1666년 설립)는 초기에는 비교조적이고 반학파적인 가상디주의 정신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했으나, 세기말에 이르러 폰트넬(Bernard Le Bovier de Fontenelle)과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 등의 영향으로 명백히 데카르트주의 성향으로 돌아섰다.
- 수학적 수용과 철학적 영향
- 데카르트는 가상디에 비해 뛰어난 수학자였으며, 그가 정립한 굴절의 사인 법칙(sine law of refraction) 등은 당대의 수학화 경향에 잘 부합했다.
- 반면 경험주의, 유명론, 완화된 회의주의, 신이 창조한 유한한 원자론, 물질과 구별되는 진공(void space) 수용 등을 특징으로 하는 가상디의 철학은 17세기 말 영국 등지에서 새로운 과학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 실재하는 학파 대 수사학적 범주
- 데카르트주의는 충실한 제자들을 거느린 구체적인 학파로 조직되었으나, 가상디주의 학파(Gassendist school)는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 가상디주의라는 명칭은 주로 데카르트주의 프로그램에 온전히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지칭하거나 비판하기 위해 수사학적으로 조작된 범주에 가까웠다.
- 즉,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진정한 경쟁자 없이 기권승을 거둔 셈이었다.
5-3. 데카르트주의자들 (The Cartesians)
- 학파의 결속과 박해
- 1660년대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클레르셀리에(Claude Clerselier), 로오, 코르드무아(Géraud de Cordemoy), 레지(Pierre-Sylvain Régis) 등으로 구성된 데카르트주의 학파가 나타났다.
- 이들은 1663년 데카르트의 저서들이 가톨릭 금서목록(Index)에 오르고, 1671년 국왕 루이 14세(Louis XIV)와 파리 대주교에 의해 대학 내 데카르트 교리 교육이 금지되는 등의 저항에 직면하면서 결속했다.
- 교리의 수정과 대중화 캠페인
- 제자들은 스승의 철학을 옹호하기 위해 이를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맞추어 수정·보완했다.
- 로베르 데가베(Robert Desgabets)는 성체변화 교리와의 호환성을 증명하려 했고, 충돌 법칙의 오류를 바로잡았으며, 물질의 3중 분할과 같은 사변적 형이상학을 가설적 수준으로 완화했다.
- 또한 클레르셀리에의 텍스트 편집, 로오의 수요일 대중 강연(진공 및 자석 시연), 폰트넬의 『세계의 다원성에 관한 대화』(1686년) 및 로오의 『물리학 논고』(1671년) 발간 등 적극적인 대중화 캠페인을 벌였다.
- 말브랑슈의 혁신과 소용돌이 이론
- 세기말 데카르트주의는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와 말브랑슈를 통해 과학 아카데미에 뿌리를 내렸다.
- 말브랑슈는 미세 물질의 각 입자 자체가 하나의 작은 소용돌이(small vortex)라는 이론을 도입하여 물체의 고체성을 설명했고, 데카르트의 우주론적 소용돌이 이론을 입자 수준으로 확장했다.
- 이는 모든 운동이 인력(attraction)이 아닌 충격/충돌(impulsion)에 의해 일어난다는 데카르트적 원칙을 고수한 것으로, 훗날 아카데미가 뉴턴주의에 저항하는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 스승을 대하는 제자들의 태도
- 가드루아(Claude Gadrois)처럼 스승의 텍스트를 무비판적으로 정리하고 가려진 부분을 밝히는 것을 임무로 삼은 추종자가 있었던 반면, 레지처럼 사변적 물리학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며 데카르트의 일반 방법론은 따르되 개별 설명에서는 스승과 다른 결론을 도출할 자유를 주장한 이도 있었다.
- 하위헌스와 말브랑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조건 스승을 추종하여 특정 학파의 당원이 되는 것은 이성의 명증성(evidence of reason)을 강조한 데카르트 자신의 철학적 규칙에도 위배된다며 ‘학파/종파(sect)’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5-4. 가상디주의자들? (The Gassendists?)
- 가상디주의 학파의 부재 원인
- 가브리엘 다니엘(Gabriel Daniel) 신부나 위에(Pierre-Daniel Huet) 등은 가상디를 새로운 학파의 수장으로 언급했고, 아베 마르탱(A. Martin)은 베르니에(François Bernier), 드로동(David Derodon), 뒤아멜(Jean-Baptiste Du Hamel), 마리오트(Edme Mariotte) 등을 가상디의 제자로 나열했다.
- 그러나 이들은 가상디주의자로서 정체성을 방어하기보다는 가상디의 특정 교리를 유용하게 취사선택한 숭배자들에 가까웠다.
- 반교조주의적 방법론
- 학파가 형성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은 가상디 철학 고유의 반교조주의(anti-dogmatism)와 문헌학적 성격에 있었다.
- 가상디에게 원자론은 가장 개연성 있는(most probable) 물질 이론일 뿐 절대적 진리가 아니었기에, 제자들이 정통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교조적 학파로 뭉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 가상디를 명시적으로 따른 질 드 로네 같은 인물도 기독교 도덕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가상디를 따를 것이며, 권위가 아닌 논거의 무게에 따라 철학적 자유(philosophical freedom)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 두 사상의 근접성과 혼재
-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는 구체제에 맞서는 과정에서 데카르트와 가상디의 철학은 실체적 형상의 거부, 입자 물리학, 작용인(운동) 및 형상과 크기의 우위라는 공통점을 공유했다. 이 때문에 반대자들은 두 입자를 기계론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어 비판하곤 했다.
- 심지어 데카르트주의자인 코르드무아가 원자와 진공을 수용했을 때, 데가베는 그가 “가상디 씨의 진영을 강화하는 분파적 행동(schism)”을 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 반면 클로드 페로(Claude Perrault)는 중력을 설명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을 채택하면서도, 인식론에서는 가상디의 경험주의적이고 비교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등 두 사상은 사상가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혼재되었다.
5-5. 보일(Robert Boyle)의 자연철학 내 반학파적 프로그램(Anti-Sectarian Program)
- 학파/종파 개념의 부정적 인식 심화
- 학파 간의 논쟁적 사용으로 인해 세기말에 이르러 ‘학파/종파(sect)’라는 개념은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던져주었다.
- 장바티스트 드 라그랑주(Jean-Baptiste de La Grange)는 1675년 저서에서 교리 전파자에 무조건 동조하는 학파들의 행태를 이단 분파들의 광기와 결탁 행위에 비유하며 비판했다.
- 왕립학회의 반학파적 지향
- 반면 소르비에르(Samuel Sorbière)가 1666년 영국의 상황을 기술했듯이, 영국 왕립학회(Royal Society)는 단 하나의 권위도 지배하지 않는 공간으로 묘사되었다.
- 비록 수학자들은 데카르트(René Descartes)를, 문인들은 가상디(Pierre Gassendi)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고 베이컨(Francis Bacon)이나 뉴턴(Isaac Newton) 같은 수호적 인물들을 추가했으나, 이것이 곧바로 종파주의로 퇴화하지는 않았다.
- 토머스 스프랫(Thomas Sprat)에 따르면, 왕립학회의 창립 목적 중 하나는 영국 정치를 황폐화했던 종파주의적 열정과 파당 간의 전쟁을 자연 탐구 영역에서 배제하고 분쟁 없는 합의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 보일의 평화주의적 프로그램
- 이러한 학회 풍토는 권위에 기반한 학파적 태도를 진리 탐구의 방해물로 보았던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의 영향이 컸다.
- 보일은 자연철학을 성경과 대등한 수준에서 신의 창조를 이해하는 ‘비학파적인 방식(non-sectarian way)‘으로 보았다.
- 그는 자연철학의 형이상학적 원리들을 둘러싼 학파 간의 분열을 넘어서서, 실험적 실천과 호환될 수 있는 절충주의적 프로그램(eclectic program)을 승인했다.
- 기계론적 철학을 통한 학파 간 경계 허물기
- 대니얼 가버(Daniel Garber)가 보일의 ‘기계론적 철학의 평화주의적 프로그램(irenic program of the mechanical philosophy)‘이라고 명명한 이 접근법은 대륙의 서로 다른 학파들을 해석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 보일은 당대 근대 철학의 두 주요 학파인 에피쿠로스(Epicurus) 추종자들(원자론자)과 데카르트 추종자들이 세부적인 면에서 다를지라도 큰 틀에서는 일치한다고 선언했다.
- 그는 『입자 철학에 따른 형상과 성질의 기원』에서 초등 입자의 가분성/불가분성 논쟁이나 진공(void)의 존재 여부 등 학파 간의 차이를 ‘물리학적(Physiological)’이라기보다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인 관념으로 치부하며 그 경계를 흐리게 만들고자 했다.
- 이는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견해들의 혼란상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으로의 집결 명령(call to arms)이었다.
5-6. 라이프니츠주의자들(Leibnizians)과 뉴턴주의자들(Newtonians)
- 새로운 두 진영의 부상
- 17세기 말에 이르러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새로운 자연철학이 등장하여 철학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 두 사람은 처음에는 데카르트주의 메커니즘에 도전했으나, 점차 형이상학적·신학적 쟁점을 두고 서로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 두 사상의 출발점과 데카르트주의 비판
-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적 기계론을 수용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자연 법칙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 그는 신체를 단순한 연장(extension)과 동일시하는 데카르트적 관점을 거부하고, 힘(force), 실체적 형상(substantial forms), 목적인(final causes)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을 재도입했으며 운동량 보존 법칙 대신 ‘힘의 보존 법칙(conservation of force)‘을 정립하여 역학(dynamics)을 정초했다.
- 뉴턴 역시 데카르트 철학의 불충분함을 비판하며 경험과 수학화(mathematization)에 기반한 새로운 과학 방법을 추진했고,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에 맞서 ‘만유인력 이론(theory of universal attraction)‘을 제안했다.
- 라이프니츠의 반학파적 태도
- 이론적 차이가 파당적 분열로 고착되는 과정에서, 라이프니츠 본인은 종교적 분열을 극복하려는 평화주의적 노력과 궤를 같이하며 학파적 태도에 반대했다.
- 그는 1679년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리를 찾는 이에게 특정 학파의 이름은 참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썼으며, 스승의 말을 단순히 패러프레이즈하는 데카르트주의자들의 ‘학파 정신(l’esprit de secte)’을 비판했다.
- 대륙에서의 뉴턴 수용 논쟁
- J. B. 섕크(J. B. Shank)는 프랑스에서 데카르트와 뉴턴 사이에 타협 없는 전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이미 1690년대부터 뉴턴의 수학과 해석 역학이 상당 부분 흡수되었다고 주장했다.
- 섕크에 따르면 데카르트주의와 뉴턴주의의 전면적인 대립 구도는 1730년대에 이르러 폰트넬과 볼테르(Voltaire) 등에 의해 일종의 수사학으로 부활하거나 발명된 측면이 있다.
- 예컨대 폰트넬은 프리바 드 몰리에르(Privat de Molières)를 뉴턴의 ‘수많은 학파(numerous sect)’에 맞서 소용돌이 이론을 방어하는 데카르트주의의 수호자로 묘사했다.
- 데카르트주의 진영의 장기적 저항
- 그러나 모데카이 파인골드(Mordechai Feingold)와 카를로 보르게로(Carlo Borghero) 등의 연구에 따르면, 뉴턴주의에 대한 저항은 말브랑슈 학풍의 데카르트주의 내부에 깊게 뿌리박고 있었으며 매우 장기적이었다.
- 카시니(Giovanni Domenico Cassini)는 1690년대부터 뉴턴에 맞서 데카르트주의적 천공을 방어하려 했고, 프리바 드 몰리에르는 1738년에도 뉴턴의 이론이 기하학적·기술적 수준에서만 유효할 뿐 인과 관계 측면에서는 말브랑슈의 작은 소용돌이(small vortices) 메커니즘이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는 1743년 저서 『역학 논고(Traité de dynamique)』 제1판에서 과학 아카데미 내의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비록 약화되었을지언정 여전히 하나의 학파(sect)를 형성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 라이프니츠주의 대 뉴턴주의: 수학적·방법론적 대립
- 뉴턴주의자들은 데카르트 진영뿐만 아니라 라이프니츠 진영과도 격렬하게 대립했다. 바젤과 파리를 중심으로 한 대륙의 라이프니츠주의자들과 영국의 뉴턴주의자들은 미적분학의 우선권 논쟁(priority dispute)을 시작으로 방법론적 가치관에서 뚜렷한 파당을 형성했다.
- 존 카일(John Keill), 데이비드 그레고리(David Gregory), 로저 코츠(Roger Cotes) 등의 영국 뉴턴주의자들은 1750년 무렵까지 출판물에서 기하학적 증명(geometrical proofs)을 선호했고 무한소와 미해석 기호의 사용을 배제했다. 이들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해설하고 대중화하는 서적들을 출판했다.
- 반면 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와 야코프 베르누이(Jacob Bernoulli) 형제, 로피탈(Guillaume de L’Hospital), 야코프 헤르만(Jakob Hermann), 피에르 바리뇽(Pierre Varignon) 등의 대륙 라이프니츠주의 수학자들은 『학술 기요(Acta eruditorum)』와 아카데미 논문집을 통해 미적분학의 대중화에 나섰다.
- 이들은 해석학적 방법(analytical method)이 뉴턴의 기하학적 방법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했으며, 베르누이와 바리뇽은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을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적용하여 그 우월성을 증명하고자 했다.
-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역시 라이프니츠의 감독 하에 서평 등을 쓰며 영국의 뉴턴주의자들에 맞서 조직적인 반뉴턴주의 학풍을 이끌었다.
- 형이상학적·신학적 대립과 베를린 아카데미 분쟁
- 1715~1716년 라이프니츠와 사무엘 클라크(Samuel Clarke)의 서신 교환은 공간의 본질, 진공, 세계 내 신의 역할에 관한 철학적 논쟁으로 번졌다.
- 뉴턴과 클라크가 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주의주의(voluntarism)와 절대 공간을 옹호한 반면, 라이프니츠는 지성주의(intellectualism)적 신관과 공간을 관계의 질서(order of relations)로 보는 주장을 펼쳤고 베르누이 형제와 헤르만 등은 우주론에서 뉴턴의 원격 작용(action-at-a-distance)을 거부했다.
- 이러한 파당적 대립은 베를린 아카데미(Berlin Academy of Sciences)에서 뉴턴을 지지했던 모페르튀이(Pierre Louis de Maupertuis) 회장 및 오일러(Leonhard Euler)가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단자론(monads) 형이상학에 반대하면서 폭발했다. 오일러는 1746년 저서에서 단자론을 비판했다.
- 1751년 사무엘 쾨니히(Samuel König)가 라이프니츠의 옛 편지를 인용하며 모페르튀이가 발견한 ‘최소 작용의 원리(principle of least action)’의 우선권이 라이프니츠에게 있다고 주장하자, 모페르튀이와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는 이를 표절 혐의로 받아들여 쾨니히를 공식 견책했고 이에 반발한 볼테르가 베를린을 떠나는 대형 분쟁으로 비화되었다.
5-7. 결론
- 학파 범주 의미의 최종적 전리
- 17세기 중반 과학 혁명이 진행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후퇴하면서 ‘학파/종파(sect)’라는 범주의 성격이 변화했다.
- 찰턴의 절충주의 프로그램에서는 고대 철학파와 같은 중립적 의미로 쓰이기도 했으나, 점차 상대를 비방하거나 보일처럼 평화주의적이고 비사변적인 실험 프로그램을 옹호하기 위한 부정적이고 논쟁적인 도구로 재정의되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초까지 이 용어는 새로운 과학을 지지하는 방법론적 동맹을 구축하고 전략적 전선을 형성하는 데 비판 없이 사용되었다.
- 통합적인 연구 프로그램을 향한 당대 수많은 요청에도 불구하고 파당적 태도는 1750년까지 사라지지 않았으며, 데카르트주의자, 라이프니츠주의자, 뉴턴주의자들 사이에 새로운 사상적 전쟁터를 구축하는 경계선 역할을 수행했다.
6. Confessionalization and Natural Philosophy
6-1. 도입 및 개념의 명확화
- 종교 분파화 가설의 정의
- 종교 분파화 가설(confessionalization thesis)이란 가톨릭(Catholic), 루터교(Lutheran), 개혁교회(Reformed) 등의 교파에 고유한 신학적 내용이 초기 근대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의 이론적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이다.
- 종교와 과학 논쟁과의 관계
- 이 가설은 종교가 현대 과학의 출현에 미친 광범위한 영향(예: 개혁교회가 노동 윤리나 사회 조직에 준 변화와 실험 방법론의 간접적 연결 등)을 다루는 논의보다는 더 좁으면서도, 동시에 과학의 범주를 넘어선 당시 자연철학의 사변적 영역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 더 넓은 성격을 지닌다.
- 예컨대 헨리 모어(Henry More)의 삼위일체 교리 재해석이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반삼위일체(anti-Trinitarian) 신학, 그리고 신성하고 비물질적인 공간 개념 등은 분파화의 획일적인 압박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독자적 영역이다.
- 종교 분파화(Konfessionsbildung)의 정치적 실체
- 이 개념은 에른스트 발터 체덴(Ernst Walter Zeeden)과 볼프강 라인하르트(Wolfgang Reinhard) 같은 역사학자들이 정립한 것으로, 근대 초기 국가 권력과 신설 교회들이 추진한 정치적 프로그램을 뜻한다.
- 이 프로그램은 신학적 교리에 대한 합의나 타협(개신교의 신앙고백서 작성 및 가톨릭의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 1545–1564)를 통한 교리 공고화), 사회적 관습과 개인적 습성의 규제, 그리고 각 교구의 신앙을 감시하기 위한 감찰 제도 구축 등을 포함했다.
- 프로그램의 한계와 자연철학자들의 태도
- 그러나 역사적 기록(감찰 보고서, 교리 초안 등)을 보면, 최종 합의된 신앙고백서들도 내부의 깊은 신학적 이견을 미봉책으로 가린 것에 불과했으며 민중 문화 속에는 이단적 믿음과 이교도의 잔재가 여전히 팽배했다.
- 따라서 초기 근대 자연철학자들이 이러한 분파화의 압박에 단순히 전적으로 굴복했다고 가정하기는 어렵다.
- 자연철학과 신학의 관계 논쟁
- 당대 자연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영향 하에 물리학, 우주론, 심리학 등을 포괄했다.
- 자연철학의 목적이 신의 섭리(divine providence)를 이해하는 데 있다는 앤드루 커닝햄(Andrew Cunningham)의 주장과, 정작 개별 자연물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에서는 신에 대한 언급이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에드워드 그랜트(Edward Grant)의 반론이 대립하지만, 분파화가 자연철학에 미친 영향은 이 논쟁의 핵심 축을 이룬다.
- 저자는 이와 관련해 종교 분파화 가설이 타당성을 갖는 두 가지 사례(우주론, 성찬식 물리학)와 반증이 되는 두 가지 사례(자연사, 에큐메니컬 철학)를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6-2. 종교 분파화와 우주론 (Confessionalization and Cosmology)
- 가톨릭 진영의 지구중심설 방어
- 가톨릭교회는 지구중심적 우주론을 공식적으로 고수했기 때문에, 가톨릭 자연철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c) 우주론의 핵심 측면을 방어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 반면 개신교 천문학자들은 대안을 탐구하는 데 더 개방적이었으며,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의 초기 반대에도 불구하고 게오르크 요아힘 레티쿠스(Georg Joachim Rheticus) 등을 통해 태양중심설(heliocentric)이 진정한 가능성으로 검토되었다.
- 예수회(Jesuit) 천문학자들의 혁신적 시도
- 가톨릭 진영의 예수회 학자들은 지구의 부동성과 중심성을 옹호하기 위해 여러 혁신적인 논거를 고안했다.
- 조반니 바티스타 리치올리(Giovanni Baptista Riccioli)는 우주의 중심이 가장 비천한 곳이라는 중세적 견해를 버리고, 지구가 피조물 중 가장 완벽한 존재인 생명체들의 터전이기 때문에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원소들의 무게로 인해 천체가 지구보다 원운동에 더 적합하다는 단순성 논리를 폈다.
- 예수회 학자들은 1572년의 신성(nova)을 더 밀도가 높은 에테르 부분이 뭉친 현상으로 해석하여, 천상계에서 우연적 변화(accidental change)는 일어나지만 실체적 변화(substantial change)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원칙을 고수했다.
- 이들은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딱딱한 천구(hard spheres) 비판(화성과 태양 궤도의 교차, 1577년 혜성 관측 등)을 수용하여,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e)와 크리스토포로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는 천체가 유동적인 매질(fluid medium)을 통과해 움직인다고 제안했고, 로데리고 데 아리아가(Roderigo de Arriaga)는 이 매질이 액체와 기체의 중간 성질을 지녔을 것이라고 보았다.
- 루터교 우주론과 섭리 개념
- 개신교, 특히 루터교 천문학자들은 우주론을 도덕적·영적 진리와 연결 지었다.
- 이들은 자연의 정상적인 과정을 신이 지탱한다는 ‘일반 섭리(general providence)‘와, 신이 자연의 과정에 직접 개입한다는 ‘특수 섭리(special providence)‘를 구분했다.
- 멜란히톤은 혜성을 인간의 부도덕한 삶에 대한 신의 경고이자 특수 섭리의 징표로 보았다.
- 루터교 신학자 야코프 안드레에(Jacob Andreae)는 1572년의 신성을 특수 섭리의 사례로 해석했고, 천문학자 요아힘 카메라리우스(Joachim Camerarius the Elder)는 이러한 특이 천문 현상을 재앙의 전조로 보았다.
- 이러한 신념은 카스파르 포이처(Caspar Peucer)나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의 사상 속에서 점성술적 예언을 옹호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 가톨릭과 루터교 우주론의 결정적 차이
- 가보르 알마시(Gábor Almási)는 천문학을 통해 신의 섭리를 배운다는 생각이 가톨릭 진영의 요하네스 드 사크로보스코(Johannes Sacrobosco) 교과서 주해자들에게도 공통적이었다고 지적했으나,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 가톨릭의 주요 사상가들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알레산드로 피콜로미니(Alessandro Piccolomini), 그리고 클라비우스는 점성술적 예언에 명백히 비판적이었다.
- 르페브르 데타플은 그것이 이교도적 기원을 가졌음을 지적했고, 클라비우스는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의 점성술 반박을 인용했다.
- 무엇보다 이들 가톨릭 학자들의 저작에서는 루터교 특유의 ‘특수 섭리(special providence)’ 개념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 따라서 우주론 영역은 종교 분파화 가설이 강한 타당성을 갖는 분야이다.
6-3. 종교 분파화와 성찬식 물리학 (Confessionalization and the Physics of the Eucharist)
- 성찬 교리와 자연철학의 교차
- 가톨릭, 루터교, 칼뱅교(개혁교회)의 서로 다른 성찬(Eucharist) 신학은 자연철학적 개념, 특히 물체의 속성 및 공간적 현존에 관한 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가톨릭의 실체변화 교리와 우연의 독립성
- 가톨릭의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 교리는 빵과 포도주의 ‘실체(substance)’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바뀌는 와중에도 맛, 색, 형태 같은 ‘감각적 우연(sensible accidents)’들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르친다.
- 이는 우연이 실체로부터 어떻게 독립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물리학적 질문을 던진다.
- 예수회(Jesuit) 학자 오노레 파브리(Honoré Fabri)는 물체적 성질이 기적적으로 주체(실체) 외부에서 독립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몸이 연장성과 불가입성을 지닌 이 우연들에 의해 관통(penetrated)된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성찬식 내 그리스도의 몸이 ‘내적 양(internal quantity)’은 지니되, 다른 물체를 밀어내는 ‘불가입성(impenetrability)’은 결여하게 된다고 보았다.
-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역시 이 가톨릭 교리를 방어하고자 했다. 그는 성찬식에 남겨진 우연들이란 ‘제2성질(secondary qualities)‘에 불과하므로, 새로 들어선 그리스도의 실체가 이전 실체(빵)의 ‘제1성질(primary qualities)‘과 동일한 감각적 인상을 유도할 수 있는 제1성질들만 갖추면 충분하다고 논증했다.
- 칼뱅교의 국소성과 물체의 필수 속성
- 장 칼뱅(John Calvin)을 따르는 개혁교회 자연철학자들에게는 물체가 ‘특정 장소에 국소적으로 현존함(locality)’이 물체의 본질적 속성임을 논증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 칼뱅은 성찬이 그리스도 몸의 ‘보여줌(exhibitio)’인 것은 맞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보이지 않는 형태로 사방에 편재(ubiquitous)한다는 주장은 물체의 자연적 본성에 위배된다고 보았다.
- 만약 몸이 편재한다면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역사적 삶은 ‘유령/환영(phantasma)’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 클레멘스 팀플러(Clemens Timpler)는 장소를 주변 물체의 표면으로 정의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과, 피조된 실체의 필수적 속성으로서의 ‘양(quantity)‘을 구분했다.
- 그는 물체가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양이 물체적·비물체적 실체 모두에 귀속되는 본질적 속성이며 따라서 물체는 반드시 국소성을 지녀야 함을 정밀하게 논증했다.
- 루터교의 내부 분열과 이론적 공간의 확장
- 루터교의 성찬학은 가톨릭이나 칼뱅교처럼 일방향으로 명확히 정렬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교파 내부의 신학적 불일치가 자연철학자들에게 다양한 철학적 탐구를 허용하는 공간을 열어 주었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스콜라 철학의 개념을 빌려 그리스도의 몸이 빵 속에 ‘결정적으로(definitively)’ 현존한다고 보았다.
- 악마가 호두껍질 속이나 거대한 집 속이나 동일하게 들어갈 수 있듯이, 영적 실체뿐만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의 물체적 신체도 무덤의 닫힌 문 뒤나 성찬의 빵 속에 형태의 변경 없이 현존할 수 있다는 물리적 가설이었다.
- 이는 주변 경계에 의해 정의되는 ‘원주적(circumscriptive)’ 현존이나, 신에게만 귀속되는 공간 편재적 ‘충만적(repletive)’ 현존과 구별되는 제3의 장소 개념이었다.
- 크리스토프 샤이블러(Christoph Scheibler) 같은 루터교 철학자가 이 개념을 지지했다.
- 그러나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은 천상학적 단 하나의 위치(location)만을 가지며, 성찬식에서는 교회의 완전성을 높이고 신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는 방식으로만 영적으로 현존한다고 보아 루터의 물리학적 가설에 만족하지 않았다.
- 부르템베르크의 개혁가 요하네스 브렌츠(Johannes Brenz) 역시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이 있는 모든 곳에 비감각적인 방식으로 편재한다는 중간적 성향의 유비쿼터스(ubiquity) 신학을 폈다.
- 야코프 셰크(Jacob Schegk)의 독자적 노선
- 튀빙겐(Tübingen)의 루터교 자연철학자 야코프 셰크는 이러한 분파 내부의 균열을 활용해 루터의 ‘결정적 현존’ 개념을 명백히 거부했다.
- 셰크는 모든 피조물이 신의 관념 속에 미리 형상화되어 있다는 플라톤적 견해와, 결과물이 근원적 원인 속에 더 완벽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스콜라 철학의 ‘탁월한 포함(eminent containment)’ 이론을 결합해 신의 편재성을 설명했다.
-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자체에 대해서는 “자연적 현실성을 통해서는 오직 단 하나의 장소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결론지으며, 성찬식 내의 그리스도 몸은 물리적·장소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효율적 역할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가시적 표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처럼 루터교 내부의 교리적 다양성은 종교 분파화의 압박과 자연철학 간의 결속을 오히려 유연하게 완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6-4. 종교 분파화와 자연사 (Confessionalization and Natural History)
- 도덕적·상징적 의미의 실종에 관한 기존 가설
- 피터 해리슨(Peter Harrison)은 초기 근대 자연사(natural history) 저작들에서 식물과 동물이 가졌던 도덕적·상징적 의미가 사라진 현상을 두고, 개신교 개혁가들의 ‘축자적·문자주의적 성경 해석 경향(literalist mentality of the reformers)‘이 텍스트의 의미를 고정함으로써 자연물 자체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할 가능성을 차단했기 때문이라고 광범위하게 논증했다.
- 그는 취리히(Zurich)의 자연학자 콘라트 게스너(Conrad Gesner)의 식물학 저작 등을 그 증거로 끌어들였다.
- 반증의 제시와 개혁가들의 실제 성경 해석학
- 그러나 바바라 존스턴(Barbara Johnston)이 지적했듯이, 게스너의 동물학 저작과 1634년 런던에서 토머스 페니(Thomas Penny)와 토머스 모펫(Thomas Moffett) 등에 의해 완성된 『곤충의 극장(Theatre of Insects)』 같은 자연사 텍스트에는 여전히 동물의 도덕적 의미가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 나아가, 개신교 신학사 연구들이 증명하듯 개혁가들의 실제 해석학(hermeneutics)은 문자주의에만 매몰되지 않았으며 비유와 상징을 적극적으로 포착했다.
- 루터는 성경이 은유, 알레고리, 수사학적 비유로 가득 차 있음을 명확히 인지했고, 바젤(Basel)의 개혁가 요하네스 외콜람파드(Johannes Oecolampad)는 성경의 알레고리가 역사적-문자적 의미뿐만 아니라 덕성을 인도하는 도덕적 의미를 결합하고 있다고 보았다.
- 취리히의 울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역시 은유가 도덕적·예언적 진리에 도달하게 돕는다고 생각했다.
- 그들이 반대한 것은 텍스트적 근거 없는 자의적인 알레고리화였을 뿐이다.
- 예언서 주해 속 동물의 도덕적 유비
- 특히 리터럴하게 환원될 수 없는 예언서 주해에서 개혁가들은 동물을 도덕적 귀감으로 널리 활용했다.
- 예컨대 이사야서 1장 3절(“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에 대해, 루터는 소와 나귀를 인간의 감사하지 못하는 태도를 꾸짖는 도덕적 모범(moral exemplars)으로 해석했다. 외콜람파드는 소와 나귀의 감사하는 성정을 사자가 은인에게 보여주는 온순함(mansuetudo)과 비교했다.
- 칼뱅 역시 브루트(brutes, 짐승)들이 인간에게 의무(officium)를 가르쳐 준다며, “종종 짐승들이 인간 자신보다 자연의 질서를 더 잘 따르고 더 많은 인내(humanitas)를 지니고 다닌다”고 관찰했다. 동물이 새끼를 돌보는 정성, 과식하지 않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만큼만 섭취하는 절제력 등을 통해 인간은 자연의 질서를 배울 수 있다는 시각이다.
- 결론적 반박
- 이러한 개혁가들의 주해 방식은 게스너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기(Historia animalium)』 번역판 서문을 인용하며 “동물의 습성은 모든 의무의 모범을 제공하고 자연의 가장 높은 권위와 함께 미덕의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쓴 자연사 서술 방식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 따라서 개신교 개혁가들의 해석학은 자연사 속 상징적 의미의 실종을 유도한 원인이 아니며, 오히려 초기 근대 자연사 내에서 동물의 도덕적 유비가 한동안 끈질기게 지속(persistence)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해 준다.
- 즉, 이 분야에서 분파화 가설은 명백한 한계를 노출한다.
6-5. 종교 분파화와 에큐메니컬 자연철학 (Confessionalization and Ecumenical Natural Philosophy)
- 에큐메니컬 운동과 자연철학
- 에큐메니즘(Ecumenism)은 종교 분파화(confessionalization)에 명시적으로 대항하고자 했던 초기 근대의 사상적 흐름이다.
- 영국의 가톨릭 자연철학자인 케넬름 디그비 경(Sir Kenelm Digby)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듯, 에큐메니컬 목적을 위한 자연철학의 활용은 지나치게 일반화된 분파화 가설에 제동을 거는 또 다른 강력한 반증이다.
- ‘공통 신학’ 구축의 도구
- 스테파니아 투티노(Stefania Tutino)가 지적했듯, 디그비의 정치에서 교회의 물리적 통합을 뜻하는 교회론적(ecclesiological) 의미의 에큐메니즘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
- 존 헨리(John Henry)에 따르면, 그의 에큐메니즘은 ‘공통 신학(common theology)‘을 모색하는 데 집중되었다.
- 디그비의 『두 개의 논고(Two Treatises)』는 가톨릭 교리(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인간은 자연적으로 불멸함)와 영국 성공회 신학(인간의 불멸성은 신의 초자연적 개입에 의함) 사이를 분열시켰던 ‘인간 영혼이 자연적으로 불멸하는가‘라는 질문에 합리적 답을 제공함으로써 에큐메니컬 프로그램에 기여했다.
- 초기 라이프니츠의 동참
- 이러한 ‘공통 신학’적 접근은 디그비를 명시적으로 참조한 루터교도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초기 저작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 공통 관념(common notions)의 활용 전략
- 디그비와 초기 라이프니츠는 서로 다른 신앙고백을 가진 구성원들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자연철학적 가설을 평가하기 위해 ‘공통 관념’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 전략을 공유했다.
- 디그비의 담론 규범(norma loquendi)
- 디그비는 사물로부터 직접 파생되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개념(naturall and plaine notion)“에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상적 언어와 공통 관념을 담론의 규범으로 삼았다.
- 그는 물체를 지각할 때 모든 인류가 분리할 수 없다고 느끼는 첫 번째 공통 관념이 ‘양(Quantity), 부피(bulke), 크기(magnitude)’이며, 양이란 곧 분할 가능성(divisibility)이라고 정의했다.
- 소크라테스가 소년일 때보다 어른일 때 더 크다는 식의 일상 대화(familiar discourse)나, 끓어넘치는 우유와 물처럼 실체(substance)는 변하지 않은 채 양(quantity)만 변하는 사례를 들어 자신의 이론에 대중적 설득력을 부여했다.
- 라이프니츠의 인식론적 원초성
- 라이프니츠 역시 인식론적으로 원초적인 개념을 통해 물질을 분석했다. 그는 일반인과 전문가 모두 물체의 본성을 연장(extension)과 저항(antitypia)의 결합에서 찾는다고 보았고, ‘물체 없이도 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오류 없는 즉각적 사고를 통해 공간과 물체가 별개임을 논증했다.
- 영혼의 비물질성 증명과 에큐메니컬 결론
- 두 철학자의 물질 분석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지점은, 물질이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므로 인간 사고의 능동적인 측면을 결코 설명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 디그비는 마음을 사물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비교하는 능력(comparing power)‘으로 정의하여 물질계의 원리로 환원될 수 없음을 밝혔다.
- 라이프니츠는 사고가 스스로 변화의 원인이 되고 반성적 인식을 동반하며,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고 비교하는 능동적 구조를 지닌다고 보아 영혼이 비물질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실체임을 논증했다.
- 소결
- 이처럼 자연철학은 여러 교파의 구성원이 공유할 수 있는 믿음의 영역을 식별하는 합리적 토대(공통 신학)를 제공함으로써, 종교 분파화의 역동성에 저항하고 이를 완화하는 에큐메니컬 도구로 충실히 기능했다.
6-6. 결론 (Conclusion)
- 사료의 이질성
- 초기 근대 자연철학과 종교 분파화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료들은 너무나 이질적(heterogeneous)이어서 하나의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관계는 주제 영역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 분파화 가설이 성립하는 영역
- 가톨릭의 실체변화 교리나 지구중심적 천문학을 방어하기 위한 철학적 분석처럼, 자연철학이 분파화 프로그램의 중심 신학을 수호하는 데 사용된 사례는 분명히 존재한다.
- 분파화 가설의 한계와 반증
- 천문 현상에 대한 섭리적 독해나 점성술적 예언처럼 한 교파(개신교)에서 두드러진 신학적 주장이 다른 종교 전통(가톨릭 등)의 저작에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 셰크(Schegk)의 저술에서 나타나듯, 같은 교파(루터교) 내의 성찬식 신학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오히려 루터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 철학적 개념이 자라날 이론적 공간을 열어주기도 했다.
- 동식물에 부여되던 상징적·도덕적 의미가 근대 자연사에서 점차 사라진 현상을 개신교 특유의 해석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개신교 해석학 자체가 자연물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
- 디그비와 초기 라이프니츠의 사례처럼 자연철학이 오히려 분파화에 저항하는 에큐메니컬 도구로 사용되었다.
- 초기 근대 자연철학의 학문적 정체성에 관한 시사점
- 이 이질성은 에드워드 그랜트(Edward Grant)의 지적처럼 자연철학자들이 항상 신과 자연의 관계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 하지만 우주론에서의 신의 섭리, 성찬식에서의 신의 현존, 창조된 자연 질서로서의 동물 미덕, 인간 영혼의 불멸성 등 본 장에서 논의된 모든 철학적 쟁점들은 결국 신과 자연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 따라서 자연철학을 수행하는 목적이 신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얻기 위함이라는 앤드루 커닝햄(Andrew Cunningham) 류의 강령적 선언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 최종 결론
- 초기 근대 자연철학의 많은 세부 사항이 신학적 관심에 의해 추동된 것은 확실하다.
- 그러나 동식물의 상징성 상실처럼 모든 측면이 신학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며, 자연철학에 영향을 미친 신학적 관심사들조차 ‘종교 분파화(confessionalization)’라는 특수한 압박 메커니즘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 따라서 “초기 근대 자연철학의 종교 분파화”라고 단정 지어 묘사할 수 있는 단일한 역사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7. The Rise of a Public Science? Women and Natural Philosophy in the Early Modern Period
7-1. 도입 및 연구의 배경
- 공적 과학의 부상 가설
- 르네상스 후기 및 근대 초기의 자연계에 대한 사유 혁명은 교회 등의 통제 하에 대중에게 닫혀 있던 사적 기관을 벗어나 지적 활동이 급증하는 사회적 현상, 즉 ‘공적 과학(a public science)‘의 부상과 나란히 일어났다.
- 그러나 19세기 초 전문적인 신설 기관들이 등장하면서 과학은 다시 대중을 배제하는 전문직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 페미니즘 역사학의 서사
- 주디스 진서(Judith Zinsser)와 에일린 오닐(Eileen O’Neill) 같은 페미니즘 역사학자들은 이 서사를 근대 초기 여성 과학 수행자들의 폭발적 증가 및 감소와 연결 짓는다.
- 진서에 따르면, 16세기 후반 이전의 과학 지식은 남성 중심적인 학술 기관 내부에서 전수되었으나, 혁명기에는 제도적 한계를 거부하는 독립적인 독학자(autodacts)들이 주도하면서 특권층 여성들이 당대의 지적 담론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 하지만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러 왕립학회나 학술지 같은 새로운 제도적 권위가 안착하면서 여성이 다시 주류에서 밀려나고 공로가 소멸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 오닐 역시 르네상스 이후 학교 밖에서 철학 활동이 꽃피우면서 여성 철학자(자연철학 포함)들이 번성할 수 있었다고 논증했다.
- 본 장의 문제 제기
- 본 장은 ‘과학이 공적으로 변하면서 여성 참여자가 늘어났고, 다시 사적·쇄신된 전문 기관으로 수렴되면서 여성이 배제되었다‘는 기존의 이분법적 서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복잡화(complicate)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 저자는 ‘공적/사적’, ‘제도/기관’, ‘자연철학’의 진정한 의미를 심문함으로써 과학혁명기 여성들의 풍부한 역할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7-2. 두 명의 여성 과학자 사례 분석 (Two Women Scientists)
① 조해너 스티븐스의 방광 결석 치료제 (Stephens’s Cure for Bladder Stones)
- 사례의 배경과 대중적 검증
- 1740년 조해너 스티븐스(Johanna Stephens)[본문에서는 Joanna Stephens로도 표기]는 방광 결석(bladder stones)을 치료하는 경구용 약을 개발한 공로로 영국 정부의 경도위원회(Board of Longitude)로부터 당대로서는 거금인 5,000파운드의 상금을 받았다.
- 1738년 데이비드 하틀리(David Hartley)가 이 약의 효능을 찬양하는 저술을 발표한 후 대중적 모금이 이어졌고, 런던 의사협회와 의회의 검증을 거쳐 상금 지급이 결정되었다.
- 제도적 권위에 의한 지적 재산권 찬탈
- 1739년 스티븐스가 『런던 가제트(The London Gazette)』에 처방전과 조제법을 완전히 공개하자, 하틀리와 스티븐 헤일스(Stephen Hales)는 영국 왕립학회(Royal Society)에서, S. F. 모랑(S. F. Morand)과 C. J. 조프루아(C. J. Geoffroy)는 프랑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s Sciences)에서 본격적인 실험적·화학적 검증을 수행했다.
- 가짜 성공 서사(apparent success story)
- 스티븐 클루카스(Stephen Clucas)가 지적했듯, 스티븐스는 돈을 벌었지만 처방전이 공개되는 순간 그녀의 약은 여성에게 닫혀 있던 전통적인 과학 기관 내부의 남성 학자들의 ‘지적 재산’으로 전환되었다.
- 존 러티(John Rutty)가 1742년 왕립학회에서 스티븐스의 약은 “단순히 경험적인 것(merely Empirical)”에 불과했으나 헤일스 등의 “기발한 실험” 덕분에 비로소 “정확하고” 과학적인 것으로 구출되었다고 보고한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 결국 남성 학자들은 과학사와 공적 의식 속에 명성을 남겼으나, 스티븐스는 “사기꾼의 역사(history of quackery)”에 박제된 채 이야기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② 에밀리 뒤 샤틀레(Émilie Du Châtelet)의 교육관과 활력 논쟁
- 남성, 여성, 그리고 교육에 관한 견해
- 에밀리 뒤 샤틀레는 어린 시절 정규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이후 수학과 물리학 분야의 뛰어난 가정교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식을 습득했다.
- 그녀는 자신의 주저인 『물리학 체계(Institutions de physique)』의 서문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청소년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학파나 국가적 당파성(national partisanship)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 여성의 지적 권리와 자신의 조건에 대한 성찰
- 뒤 샤틀레는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의 『벌의 우화(Fable of the Bees)』 번역본 서문에서 “내가 만약 왕이라면 여성들에게 인간의 모든 권리, 특히 정신의 권리를 공유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녀는 많은 여성이 흠결이 가득한 교육과 편견으로 인해 자신의 재능을 깨닫지 못하거나 묻어두고 있다고 지적하며, 자신 역시 뒤늦은 나이에야 비로소 스스로를 ‘생각하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고백했다.
- 활력(vis viva) 논쟁 참여와 공론화 전략
- 뒤 샤틀레는 움직이는 물체가 획득하는 힘의 본질을 두고 수십 년간 지속된 활력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힘을 질량과 속도의 곱(mv, 운동량)으로 보았고, 라이프니츠주의자들은 질량과 속도의 제곱의 곱(mv^2, 활력)으로 보았다.
- 프랑스 내에서는 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가 라이프니츠 편에, 프랑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비서인 장 자크 도르투 드 메랑(Jean-Jacques Dortous de Mairan)이 데카르트 편에 서 있었다.
- 공적 출판을 통한 지적 영토의 확보
- 뒤 샤틀레는 초기 『불의 본성과 전파에 관한 논고(Dissertation on the Nature and Propagation of Fire)』(1739년)의 첫 버전에서는 메랑의 데카르트주의적 관점을 지지했으나, 인쇄 도중 생각을 바꾸어 활력(mv^2) 가설을 수용하는 정오표를 추가했고 1744년 개정판에 이를 정식 반영했다.
- 나아가 『물리학 체계』(1740년)의 마지막 장에서 활력을 부정하는 메랑 등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통렬하게 비판했다. 메랑이 인쇄된 서한으로 반박하자, 그녀 역시 독립된 인쇄 출판물로 재반박하며 논쟁을 대중에게 완전히 공개했다.
- 아카데미의 장벽 우회
- 성별로 인해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s Sciences)에서 배제되었던 뒤 샤틀레는 메랑과의 논쟁을 널리 유통되는 ‘출판물’이라는 무대로 끌어내어 공론화했다.
- 메리 테럴(Mary Terrall)의 지적처럼, 이 분쟁은 아카데미의 폐쇄된 장벽을 탈출하여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라는 더 넓은 공적 영역으로 이동했다. 뒤 샤틀레는 세련된 역학 분석을 통해 아카데미의 남성 권위에 일격을 가하고 자신의 학문적 영토를 성공적으로 확보했다.
7-3. 여성과 과학: 공적/사적 영역 및 제도의 재검토
- 완전하게 독립된 개인이라는 이상에 대한 의문
- 과학이 폐쇄적인 사적 기관을 벗어나 공적 영역으로 이동하면서 여성의 참여가 늘어났다는 일반적인 내러티브는 실제 역사 속에서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 J. B. 섕크(J. B. Shank)는 데카르트를 전통적 스콜라 학풍이나 종교적 권위 없이 자연철학을 논한 독립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묘사했고, 17세기 프랑수아 풀랭 드 라 바르(François Poullain de la Barre)의 “정신에는 성별이 없다“는 선언을 통해 초기 페미니즘이 싹텄음을 지적했다.
- 제도적Standing의 지속적 위력
- 그러나 이러한 독립적 지식인 모델은 대학이나 formal한 교육 기관이 행사했던 강력한 권력을 간과하기 쉽다.
- 존 개스코인(John Gascoigne)이 증명했듯 과학혁명의 핵심 인물들 대다수는 대학 내에서 교육받았거나 대학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 공식적인 고등 교육 기관에 접근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독립적인 지식인으로서 유의미한 학문적 지위(standing)를 획득하는 데 극심한 제약을 받았다.
- 뒤 샤틀레가 모페르튀이(Pierre Louis Maupertuis)나 클레로(Alexis Clairaut) 같은 최고의 학자들에게 값비싼 개인 교습을 받아야 했던 배경에도 이러한 제도적 배제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메리 아스텔(Mary Astell), 가브리엘 수숑(Gabrielle Suchon), 마거릿 캐번디시(Margaret Cavendish) 등의 커리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 ‘공적’과 ‘사적’의 복합적 의미
- ‘사적(private)‘이라는 개념은 (1)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폐쇄적·독점적(exclusive)‘인 공간이라는 뜻과, (2) 가정이나 가족을 뜻하는 ‘친밀하고 사적인(intimate)’ 공간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뉜다.
- 섕크가 지적한 1680년대 프랑스 학술 아카데미와 살롱(salons) 간의 권력 투쟁은 제도의 개념을 넓혀준다.
- 아카데미가 전원 남성으로 구성된 폐쇄적(private) 기관이었다면, 살롱은 여성이 취향과 문화적 권위의 감독자로서 상당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혼성적 공간이었다.
- 비록 아카데미가 지식 통제권 싸움에서 최종 승리했으나, 살롱이나 메르퀴르 갈랑(Mercure gallant) 같은 저널 역시 근대 초기 아이디어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또 다른 형태의 제도/기관(institutions)이었다.
- 즉, 여성의 참여를 막은 남성 중심의 사적 기관과 여성 친화적인 대안적 제도 간의 주도권 싸움이 이 서사의 이면에 존재한다.
- 가정(The Home)이라는 사적 공간과 여성의 과학적 실천
- ‘사적(private)’ 영역을 폐쇄성이라는 의미가 아닌 ‘가정이나 가족의 친밀한 공간’으로 이해할 때, 공적 과학의 부상이 여성의 참여를 이끌었다는 일반적 서사는 다시 한번 복잡해진다.
- 알릭스 쿠퍼(Alix Cooper)의 지적처럼 과학 혁명에 필수적이었던 많은 활동이 사실 자연 탐구자들의 소박하고 평범한 ‘가정(homes and households)’ 내부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 빈켈만-키르히(Winkelmann-Kirsch) 가문의 사례
- 모니카 몸메르츠(Monika Mommertz)는 18세기 초 베를린 아카데미(Berlin Academy)의 천문학자였던 고트프리트 키르히(Gottfried Kirsch)와 그의 사후 자리를 승계한 아들 크리스트프리트(Christfried)의 가정을 분석했다.
- 마리아 마르가레타 빈켈만-키르히(Maria Margaretha Winkelmann-Kirsch)를 비롯한 이 집안의 여성들은 아카데미 내부 공간의 부족으로 인해 완전히 ‘가정’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던 천문 관측에 깊숙이 참여했다. 또한 아카데미의 재정을 지탱해 주던 수입원인 점성술 달력 제조 역시 비공식적으로 전담했다.
- 두 개의 상호 의존적인 노동 시스템
- 이는 베를린 아카데미의 업무가 (1) 공식적이고, 급여가 지급되며, 아카데미 현장에서 수행되어 공적으로 인정받는 남성의 영역과, (2) 비공식적이고, 가정을 기반으로 수행되며, 공적으로 완전히 무시되는 여성의 영역으로 분리(bifurcation)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 아카데미는 이들 여성의 성취가 없었다면 존속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성별에 따른 노동 통제 메커니즘을 통해 이들의 과학적 기여를 의도적으로 ‘보이지 않게(invisible)’ 만들었다.
- 스팀븐스의 사적 연구
- 스티븐스(Johanna Stephens)가 방광 결석 약을 어떻게 개발했는지 정확한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하틀리(David Hartley)는 그녀가 명성을 얻기 약 20년 전에 우연히 치료제를 발견했다고 전했다.
- 그녀 역시 아카데미 밖의 사적인 Confines(가정 혹은 그녀가 운영하던 별도의 병원 시설) 내에서 과학적 실천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 사적 공간의 역설과 공로의 불균형
- 이러한 사례들은 공적 과학의 부상만이 여성의 참여를 가능하게 했다는 도식을 깨뜨린다.
- 여성이 차단되었던 공식 기관 외부의 사적 venues(가족과 가정) 역시 여성이 과학을 수행할 수 있게 기능했기 때문이다.
- 다만, 과학 아카데미 같은 특정한 사적 기관은 가정을 기반으로 한 사적 공간에 비해 역사적으로 기억될 ‘지속적인 명성’을 부여할 수 있는 압도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고, 이로 인해 여성들의 공로는 철저히 지워졌다.
7-4. ‘과학(Science)’의 다양한 종류와 범주의 역사성
- 자연철학과 과학의 학문적 단절
- 근래의 역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과학 혁명기 당시에 존재했던 실제 범주는 ‘과학’이 아니라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역사주의적 행위자 범주(actors’ categories)에 주목해 왔다.
- 19세기 이전의 학자들은 오늘날의 과학과 느슨한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을 공유하는 자연철학, 화학(chymistry), 역학(mechanics) 등의 개별 학문을 수행했을 뿐이다.
- 이론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의 젠더화
- 여성이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유의미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과학적 실천들은 대개 이론적 교육이 덜 요구되는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형태의 과학‘이었다.
- 반면 남성 중심적인 대학교와 과학 학회들의 주류를 이루었던 영역은 ‘이론적 자연철학‘이었다.
- 역사적 기억의 보존과 가치 평가는 철저하게 이 이론적 자연철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스티븐스의 치료제가 남성 학자들에 의해 “단순히 경험적인 것(merely Empirical)“으로 폄하되었던 이유도 그녀가 약의 치유 원리를 수학적·형이상학적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뒤 샤틀레의 이례적 존중과 그 배경
- 반면 뒤 샤틀레(Émilie Du Châtelet)는 철저하게 남성의 영역이었던 ‘수학적으로 정교한 물리학의 이론적 기초(metaphysical, epistemological, methodological underpinnings)’를 완벽하게 정통하고 다루었다.
- 그 결과 그녀는 당대 유럽 전역에서 거대한 명성과 존중을 누릴 수 있었고, 그녀의 저술은 독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으며 『백과전서(Encyclopédie)』의 16개 주요 기사에 직간접적으로 인용되었다.
- 이러한 스티븐스와 뒤 샤틀레의 극명한 대비는 공적/사적 과학의 구분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과학을 수행했는가’라는 학문적 층위의 차이가 여성 과학자의 역사적 명성을 가르는 핵심 변수였음을 보여 준다.
7-5. 소통 양식(Modes of Communicating)의 차이
- 남성과 여성의 상이한 수사학
- 린 헌터(Lynne Hunter)에 따르면 17세기 중반까지 남성과 여성은 대략 비슷한 장소에서 유사한 장비로 과학을 실천했으나, 소통하고 증명하는 방식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였다.
- 여성들은 가족이나 지역 사회, 공동체 내부의 confinement 속에서 일했기 때문에 현대 과학이 선호하는 ‘시각적으로 재현 가능한 실연 테스트’나 ‘서면 증명을 위한 공식적 수사학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이들의 소통은 주로 구전(oral)이나 묵시적 지식(tacit knowledge), 비공식적인 도제식 관찰을 통해 이루어졌다.
- 반면 남성들은 서면 증명과 테스트에 참여했으며, 지역 공동체를 넘어 국가적·국제적 과학자 커뮤니티(문인 공화국)에 소속되어 글을 썼다.
- 수사학적 전략의 성패
- 스티븐스는 보상을 받기 위해 처방전을 공개하기 전까지 자신의 치료제에 관해 글로 널리 소통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사후 연구 배경이나 이론적 사유는 추적하기 어렵게 되었다.
- 반면 뒤 샤틀레는 동시대 남성 지식인들의 소통 양식(수학적 문체로 글쓰기, 학자들과의 조직적 논쟁, 인용 규칙 준수 등)을 완벽하게 채택했다.
- 특히 메랑(Mairan)을 아카데미라는 남성 전유의 공간 밖으로 끌어내어 유럽 엘리트층이 접근할 수 있는 ‘공적 출판’의 영역에서 논쟁을 받아치고 통제한 소통 전략은 그녀의 학문적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7-6. 결론 (Conclusion)
- 결론
- 근대 초기에 과학적 실천이 폐쇄적인 기관을 벗어나 외부로 확장되며 ‘공적 과학’의 면모를 갖추어 갔고, 이것이 여성들의 참여 기회를 넓혀 주었다는 서사 자체는 과학혁명기의 중요한 사회적 현상을 포착한 유효한 기술이다.
- 그러나 역사적 실체는 단순한 흑백 논리보다 훨씬 다층적이다.
- 대학교나 학회 같은 formal한 교육·과학 기관들은 공적 과학의 부상 속에서도 여전히 지식의 위계와 학문적Standing을 통제하는 강력한 권력으로 남아 여성을 배제했다.
- 살롱이나 저널 같은 대안적 제도, 그리고 가정과 가족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사적 공간’이 여성의 과학적 실천을 가능하게 한 중추적 venues로 기능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아울러 여성들이 주로 종사했던 실용적 과학 지식보다 남성 중심의 이론적 자연철학을 우위에 두었던 학문적 위계, 그리고 구전과 서면 증명이라는 소통 양식의 젠더적 차이가 결합되면서 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과학의 역사적 기록 속에서 사기꾼으로 폄하되거나 쉽게 지워지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