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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imony and Proof in Early-Modern England

1. 서론(Introduction)

  • 연구의 배경
    • 지난 10여 년간 근대 초기 자연철학(과학)사 연구에서 '증언(Testimony)'은 신뢰, 확률, 그리고 '사실(Fact)'의 개념 형성과 맞물려 학계의 뜨거운 관심사로 부상했다. 이는 지식의 개념과 역사학적 방법론을 둘러싸고 학자들 간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 기존 연구의 경향과 한계
    • 기존의 학자들은 주로 '법학적 사고(Legal thinking)'가 자연철학 내에서 증언을 평가하고 사용하는 데 미친 영향에 주목해 왔다.
      • 16세기에 이르러 유럽 대륙의 시민법 체계와 영국의 관습법 체계 모두에서 목격자의 증언은 재판 과정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 다수의 연구자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자연철학 전반에 법적 심문 절차가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증명했고, 초기 확률 이론의 역사 역시 법적 도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밝혀냈다.
    • 기적이나 경이로운 현상을 둘러싼 논쟁이 증언과 증거의 개념을 자극했다는 연구도 존재하며,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을 비롯한 초기 왕립학회 회원들이 '신사적인 사회적 규범(Gentlemanly social codes)'과 정직함을 무기로 삼아 과학 안에서 '신뢰(Trust)'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스티븐 셰이핀(Steven Shapin) 등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 본 논문의 문제 제기
    • 기존 연구들은 근대 초기의 지식 획득 과정을 정교하게 밝혀냈으나, 저자는 이와 다른 역사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 저자는 과학적 '사실'이나 '객관성'이라는 개념이 17세기 후반에 완연히 등장하기 전, 당시 유럽의 대학 교육을 지배하던 두 가지 핵심 학문, 즉 수사학(Rhetoric)과 변증학/논리학(Dialectic/Logic)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 두 학문은 자연철학 이전에 증언의 개념을 규정하던 가장 보편적인 지적 언어였으나, 과학사적 맥락에서는 체계적으로 탐구된 적이 없다.
  • 핵심 주장
    • 17세기 영국 과학이 실험을 '상세하고 정황적인 보고에 기반한 역사적 사건'으로 다루고 '사실'의 언어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궁극적으로 수사학과 변증학이 구축해 놓은 담론적 전통에 대한 반응이자 개혁의 결과물이다.
    • 과학적 사실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무엇을 대체했는지, 즉 그 이전의 '증언의 지위'를 먼저 추적해야 한다.

2. 수사학(Rhetoric)

  • 학문적 성격과 위치
    • 수사학은 문법을 배운 르네상스기 학생들이 그다음으로 접하는 필수 교과였다.
    • 키케로, 퀸틸리아누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전 이론을 바탕으로 사안에 맞는 논거를 찾아내고(Invention), 배치가 완성되면 문체를 우아하게 가꾸며(Elocutio), 이를 기억하여 발표하는 기술(the invention (inventio) and disposition (dispositio) of arguments, their amplification through the tropes and figures of elocutio, and techniques of memorisation and delivery)**을 가르치는 학문이었다.
  • 텍스트적 기술로서의 증언
    • 수사학적 관점에서 증언은 구어(Oral)적인 기원을 지니고 있지만, 르네상스를 거치며 철저하게 '글쓰기 실천(Practices of writing)'에 통합되었다.
      • 따라서 근대 초기에 증언을 유포하고 지탱하던 이른바 '문학적 기술(Literary technology)'은 다름 아닌 고전 수사학의 규칙들이었다.
  • 대립적 논쟁과 공통지
    • 수사학은 사안의 양면을 모두 논하는 **대립적 토론(In utramque partem)**을 기본 구조로 삼았다.
    • 연설가가 어느 입장에 서든 논증의 재료를 쉽게 길어 올릴 수 있도록 '공통지(Loci Communes)'의 교리가 발달했는데, 증언 역시 이 공통지의 하부 목록으로 취급되었다.
  • 신용(Fides/Credit)의 메커니즘
    • 수사학에서 증언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증인의 '신용(Fides/Credit)'을 옹호하거나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 키케로는 논증을 '믿음을 형성하기 위한 개연성 있는 고안물'로 정의했으므로, 증인의 신용을 높이는 것은 논증 전체의 신뢰도를 확보하는 핵심 수단이었다.
      • 당시 수사학 manuals가 제시한 '가장 신용할 만한 증인'은 대중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도덕적 품성이 결함 없는 인물이었으며, 이 기준을 완벽히 충족하는 이들은 압도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저자들(Ancients)'이었다.
        • 예: 존 셀든은 당대의 네덜란드 학자를 인용해 자신의 평판을 보증하려는 행위는 주방 보조의 보증서를 가져오는 것과 같다며, 고전 거장의 증언이 가진 압도적 지위를 대변했다.
  • 문체와 미덕의 결합
    •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세련된 문체를 인간의 에토스(Ethos)와 동일시했다.
      • 라틴어 동사 'laudare'가 '찬양하다'와 '인용하다'라는 뜻을 동시에 지녔던 것에서 알 수 있듯, 훌륭한 문장으로 쓰인 시구나 격언(Sententiae)은 그 자체로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일종의 '증언'으로 취급되어 글의 강도를 높이는 데 사용되었다.
    • 또한 타인의 저작을 인용할 때는 그의 삶과 도덕적 결백을 찬양하는 고정된 수사적 어구를 앞에 배치하는 것이 표준적 절차였다.

3. 변증학/논리학(Dialectic)

  • 학문적 성격과 대학 내 위상
    • 수사학이 증언의 효과적인 배치와 표현을 논했다면, 변증학(논리학)은 **증언을 '분류하고 검증하는 법'**을 가르쳤다.
      • 당대 교육과정(trivium)의 필수 과목이었던 변증학 교과서들은 17세기 과학자들이 선험적 설명을 거부하고 사물에 대한 '자연사(Natural history)'적 수집을 강조하게 된 근본적인 지적 장벽이자 토양이었다.
  • '비인위적 논증(Argumentum Inartificialis)'으로서의 증언
    • 르네상스 변증학에서 증언은 '비인위적 논증' 혹은 '외부적 토픽(External topic)'으로 철저히 규정되었다.
    • 이 개념의 도식은 근대적 '사실' 담론과 상충하는 지점이다.
      • 인위적 논증 (Artificial argument)
        • 논증을 펼치는 주체가 원인, 결과, 성질 등의 범주를 활용해 스스로 내부적 논리를 '만들어내는' 논증이다. 이성에 기반한 추론(ratiocination)의 결과물이므로 '합리적'이라 여겨졌다.
      • 비인위적 논증(Inartificial argument)
        • 논증자의 논리적 가공 밖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증거들이다.
          • 관습, 소문, 역사적 기록, 전문가의 증언, 현자나 대중의 판단, 문서, 맹세 등이 여기에 속하며 일부 학자들은 감각적 경험도 이 범주에 넣었다.
      • 변증학 구조 내에서 이 비인위적 논증은 언제나 인위적 논증보다 지적으로 열등하게 취급되었으며, 교과서의 맨 마지막 장에 배치되는 것이 관례였다.
  • 증언과 권위의 동일시
    • 1700년 이전의 지적 체계 속에서 '역사적 사실의 원천으로서의 증언'과 '제도적 선언으로서의 권위'는 개념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 라무스(Ramus)나 멜란히톤(Melanchthon) 같은 개혁 사상가들이 키케로의 용어를 따라 이를 '증언(Testimonium)'으로 표기하기 시작했으나, 본질은 여전히 '권위(Auctoritas)'의 문제와 중첩되어 있었다.
      • 라무스는 율법, 목격담, 계약, 신문, 맹세 등을 나열한 뒤 이 모든 것을 통칭하여 '권위와 증언'이라고 불렀다.
  • 증언 검증의 규칙들(Canons)
    • 학문적 논쟁이나 종교적 갈등(예: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교부 권위 논쟁)을 통제하기 위해 변증학 교과서들은 증언을 평가하는 명확한 규범들을 발전시켰다.
      • 이 기준들 역시 철저히 '증인의 신용(fides)'에 종속되어 있었다.
        • "해당 분야의 전문가는 자신의 예술/학문 영역 내에서 신뢰해야 한다(Artifici in arte sua credendum)."
        • "오래된 증언이 새로운 증언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 "공적인 증언이 사적인 증언보다 확고하다."
        • "인간의 증언에 기반한 부정적 논증은 무효하다."
          • 예: 갈레노스가 매독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당대에 매독이 없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 증언의 한계와 확인적(Confirmatory) 성격
    • 르네상스 학문이 수많은 고전 권위를 인용하면서도 이론적으로는 권위를 낮게 평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변증학적 원칙에 따르면, 증언은 사물의 본성(rerum natura)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 그것은 인간에게 지식을 이해시키거나 가르치지 못하며(non docet), 오직 개연적 믿음만을 낳는다.
      • 따라서 증언은 지식 탐구의 '출발점'이 될 수 없었으며, 이미 이성적·인위적 논증을 통해 도출된 결론을 맨 마지막에 권위 있게 받쳐주는 '사후 확인 및 증폭(Confirmation/Amplification)'의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야 했다.
        • 증언 단독으로는 과학적(scientifice) 증명을 결코 성립시킬 수 없었다.
  • 자연철학으로의 침투와 probabilism
    • 증언은 본질적으로 자연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나 업적과 연관된 '도덕적/시민적(moral/civil)' 영역의 산물이었다.
    • 그렇기에 증언이 자연철학 내부로 본격 도입되었다는 것은, 과학이 필연적인 증명(apodictic demonstration)의 이상을 포기하고 '도덕적 확실성(moral certainty)'과 '개연성(probability)'을 수용하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겪었음을 뜻한다.

4.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 자연사와 증언의 위상 변화
    • 17세기 자연철학에서 증언이 급격히 중요해진 배경에는 '자연사(Natural History)'에 대한 이론적 격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있었다.
      • 기존 학자들은 베이컨의 증언 검증 기준을 그의 법조인 경력과 연결 지었지만, 저자는 베이컨이 기존의 수사학적 '신용(Fides)' 개념을 수용하고 변형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전통 수사학의 거부
    • 베이컨은 1620년에 발표한 『자연사와 실험사를 위한 준비(Parasceve ad historiam naturalem et experimentalem)』 등에서 기존 수사학이 요구하던 '권위 있는 증언의 효과적 사용'을 단호히 거부했다.
      • 그는 고대인들의 거창한 이름, 문헌 인용, 학자들의 찬반 투표(Suffragia)를 자연사에서 모두 치워버릴 것을 요구했다.
      • 은유, 화려한 문체(copia), 장식적 수사 역시 배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단어의 보물창고를 채우는 화려함 대신, 사물에 대한 '단단하고 충실한 서사(solid and faithful narrative of things)'를 강조했다. 이는 에라스뮈스식 수사학 전통의 핵심인 '사물(res)'과 '단어(verba)'의 구분을 자연철학에 적용한 결과였다.
  • 신용(Fides)의 실용적 등급 분류
    • 문체적 장식은 버렸지만, 베이컨이 자연사의 사물(res)을 확립하는 방식은 여전히 수사학적 유산인 '신용(Fides)'의 틀 안에 있었다. 그는 자연사에 수용될 제보들의 신용을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었다.
      1. 확실한 신용(Certain credit):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제보로, 본문에 그대로 정중하게 기록한다.
      2. 의심스러운 신용(Doubtful credit): "~라고 전해진다", "그들이 주장하기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었다"와 같은 주석(nota)을 달아 유보적으로 기록한다. 베이컨은 책을 쓰는 과정에서 매번 양측의 논거(in alterutram partem)를 다 기록하는 것은 너무 번거롭고 작성을 지연시키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주석 체계가 실용적이라고 보았다.
      3. 정죄된 신용(Condemned credit): 완전히 거짓으로 판명되어 배제할 내용이다.
  • 증인의 검증 기준(faciunt ad pondus fidei)
    • 베이컨은 자연사 기록을 무조건 실험으로 검증하라고 요구하기보다, 먼저 그 기록을 남긴 '증인의 인격과 상황'을 평가하라고 가르쳤다.
      • 사안이 중요할 경우 저자의 이름을 명시해야 하며, 이때 다음을 검토해야 한다고 보았다.
        • 그가 직접 경험하고 안 것(Scientia propria)을 주장하는가, 아니면 대 플리니우스처럼 단순히 남의 이야기를 옮겨 적거나 베낀 것(Relatione/Exscriptione)인가?
        • 그 현상이 증인 당대의 일인가, 아니면 먼 과거의 일인가?
        • 그것이 진실이라면 당연히 수많은 목격자(testes)가 있어야 했을 법한 성격의 사안인가?
        • 저자가 가볍고 허풍이 심한 사람인가(vaniloquus & levis), 아니면 진중하고 엄격한 사람인가(sobrius & severus)?
          • 베이컨은 이러한 요소들이 '믿음의 무게를 결정(make for the weight of belief)'한다고 보았다.
          • 즉, 자연 현상 자체의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증인의 정직성과 상황을 따지는 전통적인 수사학적/인간적 검증 방식이었다.
  • 원인에서 '사실(Fact)'로의 우회
    • 영어 단어 '에비던스(Evidence)'는 당시 철저히 영국 관습법의 경계 안에서만 사용되었기에 베이컨은 자신의 철학에서 이 단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법률 용어였던 '사실에 관한 문제(matter of fact)'를 자연철학으로 끌어들였다.
      • 베이컨은 "나는 원인이 아니라 사실(Fact)을 말하고 있다", "내가 찾는 질문은 사물의 원인이 아니라 사물의 사실을 묻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 선험적인 원인(Causes)과 본성을 찾아 헤매던 기존 학문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적인 '사실' 개념을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원인 규명을 잠시 뒤로 미루고 '사실'을 수집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의 증언은 비로소 자연철학 내부에서 정당한 지위를 얻기 시작했다.

5. 존 윌킨스와 경 토머스 브라운(John Wilkins and Sir Thomas Browne)

  • 전통적 관념의 지속
    • 프랜시스 베이컨이 '사실'의 언어를 과학에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중반의 저술가들은 증언을 사물의 본성에 도달할 수 없는 취약한 논증으로 보던 르네상스 논리학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 저자는 존 윌킨스와 토머스 브라운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이 잔존하는 흐름을 증명한다.

① 존 윌킨스 (John Wilkins)

  • 초기 저작에 나타난 논리학적 제약
    • 윌킨스는 훗날 왕립학회의 초대 비서가 되어 근대적 의미의 '도덕적 확실성'과 '개연성'을 보급한 인물로 유명하지만, 1630~40년대에 쓴 초기 갈릴레오 우주론 옹호 저작들에서는 철저하게 전통 변증학의 규칙을 따르고 있었다.
  • '에비던스(Evidence)'와 증언의 분리
    • 오늘날 우리는 증언을 '증거(Evidence)'의 일종으로 보지만, 윌킨스의 초기 자연철학에서 증언과 증거는 상충하는 개념이었다. 당시 법학에서는 증언을 에비던스로 부르기 시작했으나 자연철학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윌킨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철학적 문제를 논할 때 다른 이들의 증언과 의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preposterous) 일이다. 그 후에 사물의 본성과 본질에서 도출되는 이성적 논증으로 내려가는 것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인위적 논증들(logicians가 부르는 대로)은 어떠한 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clear and convincing evidence)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언은 판단을 해결하기보다는 확인(confirm)하기 위한 용도로서 나중에 와야 한다."

  • 사물 자체보다 열등한 증언
    • 윌킨스에게 사물의 본성에서 나오는 인위적 논증이야말로 '명백한 증거(evidence)'를 가진 것이었고, 타인의 증언(비인위적 논증)은 이 증거가 결여된 불완전한 것이었다.
    • 따라서 윌킨스의 저작 구조에서도 증언은 언제나 논리적 추론이 끝난 뒤, 갈릴레오나 케플러 같은 거장들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결론이 '개연성(probability)'이 있음을 마지막으로 확인(confirmation)해 주는 보강 역할에 머물렀다.

② 토머스 브라운 (Sir Thomas Browne)

  • 실험주의와 고전적 학문관의 공존
    • 브라운은 자신의 자연사 저작에서 실험(sense/experiment)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여 과학 혁명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증언과 권위를 다루는 이론적 틀은 가장 보수적인 르네상스 논리학 체계에 묶여 있었다.
  • 원인(Causes)이 없는 증언의 취약성
    • 브라운은 『속설 비판(Pseudodoxia Epidemica)』(1646)의 첫 번째 책에서 권위와 증언에 의존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그 논거는 근대적 해방이라기보다 전통 논리학의 도식에 일치했다.

      "첫째, 현명한 검증에서 권위에 기반한 논증은 가장 약한 종류의 증명(weaker kind of proof)에 불과하다. 그것은 토피카적 입증(topical probation)이자, 우리가 부르는 대로 알몸의 단언(naked asseveration)에 의존하는 비인위적 논증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바의 원인(causes), 성질, 부속물을 전혀 선언하지 않으므로 합리적인 지식의 유도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우리의 고등한 믿음은 독단적 지시에 의해 세워져서는 안 되며, 진리의 개연성 있는 유도를 받은 후에는 증언의 구속(testimonial engagements)에서 해방되어 이성이라는 더 확실한 기반 위에 우뚝 서야 한다."

  • 엄격한 학문(Sciences)에서의 증언 배제
    • 브라운은 수학, 산수, 기하학처럼 그 자체로 알려진 자명한 원리나 존엄성(dignities and principles)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학문에서는 증언이 아무런 타당성(no validity)도 가지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자연철학에서도 단순히 저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벌거벗은 증언(bare testimonies)만 나열하는 것은 지식을 구걸하는 행위에 불과하며, 반드시 단단한 이성적 원인(solid reasons)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에비던스'와 '사실'의 부재
    • 브라운 역시 수많은 고대·근대의 문헌을 검증하고 거짓을 분리해내려 애썼지만, 그 과정에서 '에비던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사실(Facts)'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언을 철학적으로 불완전한 상태로 취급했다.

6.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 자연철학 패러다임의 전환
    • 토머스 브라운을 지나 로버트 보일에 이르면 완전히 다른 자연철학적 세계가 펼쳐진다. 최근 학계는 보일의 텍스트가 독자들에게 주는 '가상 목격(virtual witnessing)' 효과나 신사적 신뢰 네트워크에만 주목해 왔으나, 저자는 보일이 전통 논리학·수사학의 증언 규칙들과 치열하게 갈등하고 이를 개조하는 과정에 집중해야 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① 수사학적 '인용 관행'의 거부와 Plain Style의 구축

  • 문체 장식과 권위의 배격
    • 보일은 수사학적 기법이 청중과 상황에 맞춰 생각을 꾸미는 데 유용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 실험 저작인 『새로운 물리-역학적 실험(New Experiments)』(1660)에서 그는 방법론, 문체, 우아한 장식들이 주는 이점을 의도적으로 포기했다고 명시했다. 『일부 생리적 에세이(Certain Physiological Essays)』(1661)에서도 화려한 수사학적 장식(ornatus)을 배격하고 명확함에 집중하는 '철학적 필체'를 지향했다.
  • 키케로를 통한 역설적 정당화
    • 보일은 자신의 투박하고 평범한 plain style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수사학의 최고 권위자인 "웅변가들의 왕, 키케로 자신"의 증언을 인용하는 수사학적 기술을 발휘했다.
  • '에세이' 형식과 짜깁기 비판
    • 그는 체계적이고 방대한 논문 형식을 피하고 '에세이' 형태를 취했는데, 이는 타인의 문구와 의견을 기계적으로 엮어놓은 '랩소디(Rhapsody, 당대에는 짜깁기 글을 의미)'가 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유명 저자들의 세련된 명언(sententiae)으로 글을 부풀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수사학과 논리학이 '증언'과 '권위적 명언'을 동일시하던 전통을 정면으로 저격한 행동이었다.

② 도덕 분야와 자연철학 분야의 '증언' 분리

  • 젊은 시절 보일의 전통적 태도
    • 보일이 처음부터 증언과 권위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철학이 아니라 '윤리학(ethics)'에 관한 글을 쓰던 젊은 시절의 보일은 "수많은 현자와 영웅들이 각자의 시대, 국가, 종교를 초월하여 덕(virtue)의 우월함에 동의했다는 것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언(Testimony above Exception)이다"라며 전통적인 '현자들의 합의'라는 개연성 기준을 완벽하게 수용하고 있었다.
  • 자연철학에서의 혁신: 재판관이 아닌 목격자
    • 그러나 자연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보일은 이 기준을 전면 수정했다. 그는 타인의 저작을 대할 때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내가 다른 저자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그들을 '재판관(Judges)'이 아니라 '목격자(Witnesses)'로 삼기 위함이다. 그들의 저술을 내 의견을 증명해 주는 신탁(Oracles)으로 숭배하거나 글을 꾸미는 장식품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실을 증명하는 인증서(Certificates to attest Matters of fact)'**로 사용하는 것이다."

  • 인격(Person)에서 사물(Thing)로의 이동
    • 보일은 "사람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추어 말하되, 사물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말하겠다"고 했다. 이는 증인의 인격, 신분, 도덕적 자질(person)을 보고 그 증언의 참/거짓을 판단해야 한다던 오래된 논리학적 가정을 깨부수고, 증언을 인격의 영역에서 사물(thing)과 사실의 영역으로 이동시킨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③ 보일 문서(Boyle Papers)에 드러난 논리학 규칙의 변형

  • "전문가는 자기 학문 내에서 신뢰해야 한다"는 규칙 비판
    • 보일은 『회의적 화학자(The Sceptical Chymist)』(1661)에서 논리학의 유명한 격언인 'Artifici in arte sua credendum(전문가의 말은 믿어야 한다)'이 과학 발전을 어떻게 가로막는지 폭로했다. 연금술사들이 불을 통해 얻은 물질이 원소라고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때, 일반인들은 '논리학의 규칙'에 따라 그 전문가들의 말을 겸손하게 믿어버린다는 지적이었다.
  • 보일의 친필 명제들(Propositions)
    • 왕립학회에 소장된 보일의 미출간 문서(Boyle Papers, vol. 9)에는 전통적 논리학의 토포스(topics)들을 자연철학의 목적에 맞게 직접 개조하려 했던 명제들이 생생히 남아 있다.
      • "권위에 대한 지나친 경외는 철학에 해롭다."
      • "인간의 권위는 올바른 이성(right Reason)이나 경험(Experience)에 대항하여 힘을 발휘할 수 없다."
      • "인간의 증언(Humane Testimony)은 자연철학에서 위대하며 거의 필수적인 용도를 가진다."
        • 토머스 브라운이 자연철학에서 증언의 가치를 극도로 낮게 평가한 것과 완전히 대조되는 보일의 혁신적 선언이다.
      • "명백한 이성이나 쉬운 실험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증언에 의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 "정직하고 진실한 증인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matters of fact)이 제보자의 전문적 기술(Skill)을 요구하는 성격의 것이라면 그 증언은 불충분(insufficient)할 수 있다."
        • 기존 논리학이 증인의 '도덕적 성품'만 따졌다면, 보일은 사물을 정확히 관찰할 수 있는 '과학적 기술'이 있어야만 증언이 성립된다고 규칙을 바꾼 것이다.

④ 증언의 사후 확인(Confirmation)에서 사전 정보(Information)로의 전환

  • 실험이라는 시공간 초월적 검증대
    • 보일은 파라셀수스의 말을 교정하면서, 철학에서 "의심은 곧 신중함"이며 모든 주장에는 증거가 따라야 한다고 했다. 보일에게 '실험(Experiment)'은 이성과 더불어 증언의 진위를 측정하는 객관적 기준이 되었다. 역사적 사건은 다시 재현할 수 없지만, 자연학적 실험은 언제든 다시 실행하여 증언을 검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 지식 획득 순서의 전도
    • 토머스 스프랫(Thomas Sprat) 역시 『왕립학회사』(1667)에서 기존의 철학자들은 먼저 원인을 마음대로 추측하고 논리를 세운 뒤,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을 확인(confirm)해 줄 '수많은 증언들의 군중'을 부주의하게 받아들였다고 비판했다.
      • 반면 왕립학회의 새로운 과학은 이를 완전히 거꾸로 실행했다. 증언은 더 이상 논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확인(Confirmation)' 카드가 아니라, 추론과 법칙 도출을 위해 맨 처음에 수집해야 하는 원자재, 즉 '정보(Information)'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7. 결론 (Conclusion)

  • 지적 지형의 대전환
    • 근대 초기 영국 자연철학에서 일어난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증언(Testimony)에 부여된 지위의 근본적인 이동이었다.
    • 토머스 브라운의 시대까지만 해도 증언은 **사물의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열등한 '비인위적 논증'**에 불과했으나, 로버트 보일에 이르러 자연철학의 거의 필수적인 기초로 재정립되었다.
    • 저자는 이 현상이 단순한 과학 방법론의 등장을 넘어, 유럽의 대학 교육을 지배하던 르네상스 토피카(Topical argument, 주제별 논증) 체계가 완전히 해체되는 과정이었다고 결론짓는다.

① 토포스(Topicks)의 몰락과 언어적 변질

  • 스프랫의 논리학 공격
    • 토머스 스프랫은 『왕립학회사』(1667)를 통해 기존 대학의 전통적인 '논리학과 수사학의 토포스(Topicks)'를 강하게 비판했다.
    • 고대 철학의 핵심이었던 이 도구들은 말재주를 늘리고 논쟁을 부풀릴 뿐, '실험의 예술'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스프랫은 새로운 과학이 '추론의 토포스'가 아니라 '작업의 토포스(Topicks of working)'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단어들의 의미 변화
    • 이 지적 투쟁의 결과로 근대 초기를 지배하던 핵심 논리학 용어들의 의미가 영구적으로 변질되었다.
      • 원래 '논증을 길어 올리는 자리'를 뜻하던 전문 논리학 용어인 '토픽(Topic)'은 고유의 기술적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일반적인 '화제'나 '주제'를 뜻하게 되었다.
      • 수사학에서 논증의 재료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두던 공간인 '공통지(Commonplace)'는 가치 하락을 겪으며 오늘날의 '진부하고 흔해 빠진 말'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전락했다.
      • 반면, 과거 이 토포스 체계의 맨 마지막 장에 얹혀 있던 '증언'은 구조의 붕괴 속에서 홀로 살아남아 지식의 전면으로 부상했다.

② '사실(Fact)'과 '에비던스(Evidence)'의 법학적 침투

  • 홉스의 목격자 정의
    • 자연철학적 실험주의에는 비판적이었던 토마스 홉스조차도 『리바이어던』(1651)에서 감각과 기억이 주는 지식을 '절대적 지식(Absolute knowledge)'으로 분류하며, "사실(Fact)이 행해지는 것을 보거나 그것이 행해진 것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목격자(Witness)에게 요구되는 지식"이라고 정의했다.
    • 이는 '사실'과 '증언'의 결합이 당대 지식인 사회에 보편적으로 퍼졌음을 방증한다.
  • 포르-루아얄 논리학(Port-Royal Logique)의 혁신
    • 아르노와 니콜이 저술한 『포르-루아얄 논리학(Port-Royal Logique)』(1662)은 근대적 증거 개념의 탄생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텍스트이다.
    • 이 책은 기존의 '증언/권위'라는 구식 토포스를 완전히 삭제했다. 대신 인간의 믿음에 의존하는 사건들을 다루는 규칙을 제시하며 유명한 '내부적 증거'와 '외부적 증거'의 구분을 최초로 정립했다.

      "내가 **내부적 상황(internal evidence)**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fact) 자체에 속한 것들이며, **외부적 상황(external evidence)**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믿도록 만드는 증인들의 인격(persons)에 관한 것이다."

  •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오류 교정
    • 저자는 『확률의 출현』을 쓴 유명 학자 이언 해킹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 해킹은 근대 이전의 '개연성(probable)'이 오직 권위 있는 자가 승인한 것만을 의미했다고 보았으나, 서전트슨은 그것이 권위뿐만 아니라 전통 변증학의 모든 토포스 논증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었다고 바로잡는다.
    • 오히려 17세기 후반 포르-루아얄 논리학에 이르러서야 확률과 개연성의 개념이 '증언을 통해 알게 된 사실'로 제한되면서 근대적 확률 이론이 비로소 출현한 것이다.

③ 존 로크(John Locke)와 라이프니츠(Leibniz)에 의한 지적 확립

  • 로크의 증언과 권위 분리
    • 존 로크는 『인간 지성론』(1689)에서 개연성의 중요한 기반으로 "인간의 증언이 가능한 사안, 즉 사실에 관한 문제(matter of fact)"를 설정했다. 로크는 증언을 통해 사실을 확보하는 경험적 방법을 확립한 반면, 과거에 증언과 한 몸이었던 맹목적인 '권위(Authority)'에 대해서는 "개연성을 측정하는 마지막 잘못된 척도"라며 강하게 배격했다.
  • 라이프니츠의 종합
    • 로크의 철학을 검토하면서 라이프니츠는 수사학적 경계가 어떻게 완전히 무너졌는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그 둘은 섞일 수 있다. 왜냐하면 증언(testimony) 자체가 하나의 사실(fact)을 제공할 수 있고, 그 사실은 다시 이성적인 인위적 논증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최종 결론

  • 17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자연철학에서 '에비던스(Evidence)'라는 단어는 과학적 증명(scientifice)이 결여된 인간의 증언에는 결코 쓰일 수 없는 이질적인 법률 용어였다.
    • 그러나 17세기를 거치며 전통적인 논리적·수사학적 위계가 무너지고 법학의 '사실'과 '에비던스' 개념이 철학 내부로 성공적으로 침투했다.
  • 그 결과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어떤 과학자도 "증언을 통해 확보된 '사실의 증거(evidence of the facts)'를 고려하지 않고 자연계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 증언이 과거의 '사후 확인용 논증'에서 근대 과학의 '객관적 정보 수집과 기초 자재'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 이것이 근대 초기 영국 자연철학이 이룩한 숨겨진 제도적·지적 혁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