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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lightenment for the Common People? Frederick II and the Philosophes on Popular Prejudice, Deception, and Education

  • Lifschitz A. Enlightenment for the Common People? Frederick II and the Philosophes on Popular Prejudice, Deception, and Education. Modern Intellectual History. Published online 2026:1-27. doi:10.1017/S1479244326100468

서론 및 인식론적 배경: 인간 정신의 취약성

1. 논쟁의 출발점과 문제제기

  • 1770년의 충돌: 1770년 여름,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 king of Prussia)는 당시에 가명으로 출판되었던 돌바크 남작(Baron d'Holbach)의 『편견에 관한 에세이(Essai sur les préjugés)』를 읽고 깊은 불만을 느껴 이를 공적으로 반박하는 글을 썼다.
    • 프리드리히 2세는 "편견은 평민들의 합리성이다(“prejudices are the rationality of the common people.”)"라고 단언하며, 대중을 오류 속에 방치하는 것이 통치와 사회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냉랭한 현실주의를 피력했다.
    • 디드로의 분노와 달랑베르의 중재
      • 이에 대해 『백과전서(Encyclopédie)』의 편집자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는 진리를 옹호한다면서 정작 대중에게는 진리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국왕의 태도를 "가장 일관성 없는 독재자의 행태"라며 격렬히 비난했다.
      • 반면, 보다 온건했던 **장 르 롱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는 국왕과 서신을 교류하며 이 정서를 완화하려 노력했고, 이 과정은 1780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현상 공모전(prize competition at the Berlin Academy), **"대중이 속는 것이 유용한가?"(“whether it is useful for the people to be deceived.”)**로 이어지게 되었다.
  • 본 논문의 연구 목적
    • 기존 학계는 이 대논쟁이 1780년 공모전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1780년대 중반 칸트 등의 "계몽이란 무엇인가" 논쟁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 그러나 저자는 이 논쟁이 1760년대 예수회 추방, 볼테르의 사법 개혁 캠페인, 그리고 더 나아가 17세기부터 이어져 온 '인간 이해력의 한계'에 대한 장기적인 담론에 깊이 뿌리 박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2. 가다머의 '계몽주의관'에 대한 비판과 재평가

  •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의 주장
    • 가다머는 그의 명저 『진리와 방법』(1960)에서 18세기 계몽주의를 극단적인 데카르트주의적 이성주의로 규정했다.
      • 그에 따르면 계몽주의는 역사적 맥락이나 관습을 무시한 채 순수 이성만을 만물의 척도로 삼았으며, "모든 편견에 대한 근본적인 편견(“prejudice against all prejudices.”)"을 품고 있었다.
  • 저자는 프리드리히 2세, 볼테르, 달랑베르 등 계몽주의 주류 지식인들이 결코 이성의 절대적 주권만을 맹신한 철부지들이 아니었음을 강변한다.
    • 이들은 오히려 인간의 유한성을 깊이 인정했으며, 사회정치적 안정을 위해 물려받은 관습, 종교적 환상, 그리고 '해롭지 않은 편견'이 지닌 실천적·체제 유지적 유용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3. 인식론적 배경: 로크적 겸손과 온건한 회의주의

  •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1689)
    • 18세기 중반 프랑스와 유럽의 주류 계몽 사상은 해당 저서에 절대적인 빚을 지고 있었다.
    • 로크는 신이 인간에게 절대적 확실성이 아니라 '확률의 황혼(twilight of Probability)'만을 허락하셨다고 보았다.
      • 감각적 입력에 의존하는 인간은 사물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없으므로, 지적 확실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만이자 위험한 '열광주의(enthusiasm)'에 불과했다.
  • 온건한 회의주의(mitigated skepticism)
    • 뉴턴 물리학의 등장과 맞물려, 당대 지식인들은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 대신 '경험에 의해 검증 가능한 가장 확률 높은 가설'에 집중했다.
    • 베를린 아카데미의 이신론자 다르장(Marquis d’Argens)이나 개신교 목사 포르메(Formey)처럼 서로 판이한 인물들도 종교적 교조주의와 무신론적 급진주의를 모두 타파할 무기로 이러한 인식론적 겸손을 공유했다.
  • 프리드리히 2세의 초기 사상 (1738년)
    • 왕세자 시절 프리드리히는 볼테르의 뉴턴 해설서를 읽고 『정신 오류의 무죄함에 관한 논문(Dissertation sur l’innocence des erreurs de l’esprit)』(1738)을 썼다.
      • 여기서 그는 우주의 불가해성과 교육의 영향으로 인해 "오류 속에 사는 것이 인간의 필연적인 몫"이라고 주장했다.
      • 그는 죽어가는 환자나 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믿는 광인에게 진실을 강요하는 것보다 '해롭지 않은 오류' 속에 놔두는 것이 나은 것처럼, 인간의 편견을 억지로 깨부수려 하면 인류 전체를 말살해야 할 것이라며 일찌감치 피론주의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를 취했다.
        • 결국 사유적인 형이상학보다 중요한 것은 '인류애를 잃지 않는 실천 윤리'라는 것이 그의 초기 결론이었다.

사회정치적 맥락과 선구자들: 베일, 퐁트넬, 볼테르

1. 사회정치적 기만론의 역사적 배경

  • 고귀한 거짓말과 유익한 거짓말
    • 대중을 기만하거나 환상 속에 놔두는 것이 지닌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담론은 플라톤의 '고귀한 거짓말(nobel lie)'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초기 근대 유럽에서 이는 박해나 전쟁 상황에서 목숨을 구하고 종교적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의도적인 불성실, 즉 '유익한 거짓말(mensonge officieux)'의 형태로 나타났다.
  • 마키아벨리와 국가 이성(Reason of State)
    •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제18장 “In What Ways Rulers Should Keep Their Promises.”에서 대중은 당장의 필요에 사로잡혀 결과만 보기 때문에, 영리한 지배자라면 신의를 저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국가 이성'과 '개인 도덕(individual morality)'의 분리는 젠틸레(Gentillet) 같은 사상가들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았으나, 피에르 베일(Pierre Bayle) 등은 통치의 안녕을 위한 주권자(sovereign)의 어쩔 수 없는 은폐를 일정 부분 인정하기도 했다.
  • 프리드리히 2세의 『반마키아벨리』(1740)와 변화
    • 프리드리히 2세는 즉위 직후 낸 저작에서 마키아벨리의 기만론을 표면적으로 거부했다. 18세기에는 여론의 감시가 극심해 군주의 기만이 금방 탄로나므로 '정치적 유용성' 면에서 손해라는 논리였다.
    • 그러나 1746년 실레시아 전쟁을 겪은 후, 왕은 고정된 도덕적 기준으로 sovereign의 결정을 평가할 수 없으며 신민의 안녕을 위해 때로 개인의 도덕성을 유예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국가 이성론을 노골적으로 수용했다.

2. 피에르 베일(Pierre Bayle)의 모호한 유산

  • 대중의 맹신성에 대한 한탄
    • 베일은 대중이 기성 전통에 눈이 멀어 쉽게 속아 넘어가며, 이로 인해 대중보다 더 계몽된 철학자들이 끊임없는 위험에 처한다고 불평했다. 그는 인간의 게으름 때문에 통치자들이 거짓말에 의존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 진리 추구의 양면성
    • 그러나 동시에 베일은 『혜성에 관한 다양한 생각(Pensées diverses sur la comète)』(1682)에서 "정치인이나 성직자들이 평민에게 진리를 숨기는 것이 편의에 부합한다고 믿을지라도, 기독교적 신중함을 지키는 선에서 진리를 명확히 밝히는 일은 허용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 이러한 베일 사상의 모호함과 분열은 18세기 후반 계몽주의자들에게 고스란히 상속되었다.

3. 퐁트넬(Fontenelle)과 '닫힌 손'의 은유

  • 귀족주의적 지식관
    • 프랑스 아카데미 des sciences의 비서였던 퐁트넬은 소수의 과학적·철학적 엘리트들이 진보를 주도하되, 굳이 대중 전체를 계몽하려 들 필요는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 "손안의 진리"
      • 그는 만약 자신이 손안에 모든 진리를 쥐고 있다면 평민들에게 확산시키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절대 열지 않겠다는 악명 높은 격언의 주인공으로 당대에 끊임없이 인용되었다(실제 그의 저작에는 없으나 정서를 대변).
      • 그의 『신탁의 역사(Histoire des oracles)』나 대화록은 대중의 오류와 미신이 의도적인 조작이라기보다는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한계(상상력의 과잉)라고 보았으며, 진리가 공공연히 밝혀지면 사회적 위안과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4. 볼테르(Voltaire)의 세밀한 의미론적 구별

  • 미신과 편견의 분리: 볼테르는 이 두 용어를 철저히 구별했다.
    • 미신(Superstition): 종교적 의식이나 광신주의를 포괄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언제나 해롭고 박멸해야 할 대상이었다.
    • 편견(Prejudice): 도덕적 지각이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신에 대한 믿음이나 부모 공경을 가르치는 것처럼, 이성과 판단이 승인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유익하고 필수적인 관습'을 의미했다.
  • 『철학 사전』(1764)과 하향식 계몽
    • 「사기(Fraude)」 항목에서 볼테르는 공자의 제자와 파키르의 대화를 통해, 노동자나 농민도 교양인과 같은 점토로 만들어졌으므로 기본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이 교육은 미신을 걷어낸 '단순한 도덕 종교(이신론)' 수준에 머물러야 했다. 사회 유지와 평민의 범죄 억제를 위해서는 형이상학적 진리보다 사후의 보상과 처벌을 믿게 만드는 '이로운 편견'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 사회 계층별 낙수 효과
      • 볼테르는 좌절할 때마다 "평민은 계몽될 가치가 없다"고 독설을 퍼부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교육받은 부르주아지와 지배 엘리트, 성직자들을 먼저 관용의 대의로 전향시키면 점진적으로 하층민에게까지 유익한 낙수 효과가 미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하향식 개혁을 믿었다.

1760년대의 정치적 도화선과 세 지식인의 서신 논쟁

1. 정치적·사회적 맥락: 예수회 추방과 교육 개혁 논쟁

  • 예수회 추방(1760년대)의 파장
    • 1760년대 프랑스와 스페인 등지에서 예수회 교단이 추방되고 1773년 교황에 의해 공식 해체되면서 유럽 전역에 거대한 교육적 공백이 발생했다.
    • 평신도 중등 교육을 독점하던 예수회가 사라지자, 국가 행정관, 성직자, 철학자들 사이에서 "누가 교육을 주도할 것인가", "교육을 어디까지 확대해야 하는가"를 두고 격렬한 개혁 논쟁이 전개되었다.
  • 농업 경제와 교육의 한계
    • 당대 프랑스는 농업 중심 경제였기 때문에, 하층 노동자들에게까지 중등 교육을 확대하는 것은 사회적 태만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 1763년 라 샬로테가 농장 노동자들을 교육 대상에서 철저히 제외한 개혁안을 내놓자, 볼테르는 "유용한 농부들을 게으른 성직자로 만들지 않는 훌륭한 조치"라며 극찬을 보냈다.
      • 즉, 주류 계몽주의 내에서도 진정한 대중 교육(기초적 훈련을 넘어선 교육)은 시기상조로 여겨졌다.

2. 슈발리에 드 라 바르 사건(1766)과 프리드리히 2세의 도발

  • 사건의 발단
    • 1766년 프랑스 아브빌에서 '슈발리에 드 라 바르(Chevalier de La Barre)'라는 청년이 십자가를 모욕하고 신성모독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볼테르는 이를 가톨릭 교회의 광신주의가 낳은 사법적 학살로 규정하고 "악명을 짓밟아라(écrasez l’Infâme!)" 캠페인을 전개했다.
  • 국왕의 냉소적 반박
    •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캠페인을 이끌던 볼테르에게 서신을 보내 정면으로 제동을 걸었다. 왕은 청년이 아무리 불합리할지라도 '기성의 공통 관습과 신념'을 의도적으로 모욕한 죄가 크다고 보았다.
    • 라 바르 사건에 대한 프리드리히 2세의 핵심 논거
      1. 관습과 사상의 자유 분리: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과, 대중이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종교적 관습을 공적으로 모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소크라테스나 가생디처럼 현명한 철학자들은 공적 예측(기성 사회의 조건)을 존중하며 그 안에서 조용히 사유했다.
      2. 퐁트넬의 재인용: 왕은 볼테르에게 "당신의 손이 진리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그것을 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라"는 퐁트넬의 격언을 상기시키며, "평민들은 계몽될 자격이 없다(Le vulgaire ne mérite pas qu'on pense à l'éclairer)"는 볼테르 본인의 과거 냉소적 발언을 그대로 되받아쳤다.
      3. 체제 내부적 점진주의: 프로이센의 관용 정책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점진적으로 계몽을 확산하는 방식이다. 폭력적인 도발은 오히려 반동을 부를 뿐이다.
        • 실제로 프리드리히는 라 바르의 공범이었던 데탈롱드를 프로이센의 장교로 임명해 망명을 주선하면서, 자신은 박해받는 자의 세련된 보호자이자 질서 유지자라는 이중적 면모를 과시했다.

3. 클레베(Cleves) 식민지 구상과 아름다운 환상

  • 실패한 유토피아
    • 1766~1767년 사이,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프로이센령 클레베 지역에 박해받는 프랑스 지식인들을 위한 '지식인들의 식민지(colony of persecuted intellectuals)'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이 구상은 평민들과 철저히 격리된 채 군주의 보호 아래 지적 자유를 누리려는 엘리트주의적 계몽관을 잘 보여준다.
  • 체제로서의 국가 불가능성
    • 프리드리히 2세는 인류가 가진 경이로운 것에 대한 집착과 환상 때문에, 완전히 계몽된 사회는 예수회처럼 '지구상에 흩어진 작은 학자 공동체' 수준에서나 가능하지, 하나의 거대한 '안정적인 국가'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나의 편견을 없애면 인류는 즉시 다른 편견을 가공해 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 볼테르 역시 이에 동의하며 "우리가 가르쳐야 할 대상은 육체 노동자(인민)가 아니라 생각할 준비가 된 좋은 부르주아와 도시 거주자"라고 한발 물러섰다.

4. 달랑베르와의 대결: 닫힌 손을 어떻게 열 것인가

  • "우화 없는 종교가 가능한가"
    • 1769년 11월, 프리드리히 2세는 달랑베르(d’Alembert)에게 "과연 평민들이 종교 체계에서 마법 같은 우화나 가짜 설화 없이 지낼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를 도발했다.
    • 왕은 대중이 먹고살기 바빠 이성적 사유를 할 여가가 없으므로 그들을 오류 속에 방치하고 범죄 통제에만 집중하는 것이 군주의 현실적 의무라고 주장했다.
  • 달랑베르의 손가락 은유
    • 달랑베르는 국왕의 암울한 군주관에 맞서 강력한 비유로 반박했다.

      "손을 너무 갑작스럽게 여는 철학자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주먹이 잘릴 뿐이다. 그러나 손을 굳게 닫아두고 있는 자(프리드리히 2세) 역시 인류에게 빚진 바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를 쥐고 있다면, 손가락을 하나씩, 차례로, 조심스럽게 열어야 한다. 그러면 대중은 조금씩 미신을 버리고 wholesome한 진리의 양식을 수용할 것이다."

  • 간접 작전의 제안
    • 달랑베르는 대포를 미신의 집에 직접 조준해 쏘면 창문에서 총알이 날아오므로, 그 집 옆에 은밀하고 조용하게 '더 편리하고 살기 좋은 이성의 집'을 지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 그러면 대중은 강요하지 않아도 imperceptibly(Imperceptibly, 눈에 띄지 않게) 새로운 집으로 이주할 것이며, 표범(미신)들로 가득 찬 기존의 집은 스스로 황폐해질 것이라는 점진적 개혁론이었다.

경제적 한계에 대한 자각과 돌바크의 급진주의에 대한 반박

1. 프리드리히 2세와 달랑베르의 '절도 정당성' 논쟁 (사회경제적 장벽)

  • 논쟁의 발단
    • 1770년 1월, 달랑베르는 계몽과 교육의 문제를 넘어서는 파격적인 가상 시나리오를 국왕에게 제시했다.
    • 만약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극빈한 아버지가 사회의 모든 자선 간청을 거절당했고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부유한 시민의 재산을 훔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 국왕의 입장 선회
    • 처음에 프리드리히 2세는 국가의 복지 제도와 사적 자선이 존재하므로 그러한 아사 직전의 상황은 비현실적이라고 회피했다.
    • 그러나 달랑베르가 극단적인 궁핍 상황을 완강하게 밀어붙이자, 결국 1770년 4월 서신을 통해 절도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미덕에 찬 행동'이 될 수 있다고 양보했다.
    • 프리드리히 2세가 인정한 절도 정당화의 근거
      1. 사회적 원조가 거부당한 상태에서, 자신과 가족을 굶어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타인의 잉여 재산을 훔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범죄이다.
      2. 이 경우 절도의 내면적 의도는 가족 보존이라는 미덕에 부합하며, 행위 자체는 불가피한 필연적 필요성이다.
      3. 사회의 유대는 상호 봉사의 의무 위에 수립되는데, 사회가 무자비하게 원조를 거부한다면 계약은 깨지고 강자의 권리만이 지배하는 '순수한 자연 상태'로 회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공적 계몽의 사회경제적 한계 자각
    • 달랑베르는 국왕의 파격적인 양보에 동의하면서도, 이 정당성을 공적으로 선언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만약 이를 공개하면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대항해 무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달랑베르는 구체제 신분 사회와 현대 상업 사회에 내재한 몬스터(Monstrous, 기형적인) 부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사회의 모든 계급이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 도덕 저작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 즉, 지적·종교적 한계 외에도 '경제적 불평등'이 대중 계몽의 거대한 장벽임을 두 지식인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2. 돌바크 남작의 도전: 『편견에 관한 에세이』 (1770)

  • 급진적 계몽주의의 선언
    • 1770년 5월,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 급진 사상가 돌바크 남작이 가명으로 출간한 『편견에 관한 에세이(Essai sur les préjugés)』를 접하고 깊은 분노를 느꼈다.
    • 돌바크의 핵심 주장은 루소의 사슬 비유를 인식론적으로 변형한 것이었다.
      • 인간은 원래 진리를 향해 나아가도록 운명 지어졌으나, 사제들과 그들과 결탁한 기성 정부들이 대중을 노예화하기 위해 편견, 미신, 오류의 거미줄을 쳐놓았다는 논리였다.
  • "유용한 오류는 없다"
    • 볼테르나 프리드리히 2세가 '사회 유지에 유용한 해롭지 않은 편견'을 인정한 것과 달리, 돌바크는 "인류에게 유용한 오류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편견은 사회에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 따라서 철학자들은 당장의 맥락에 타협하지 말고 전력을 다해 대중의 허위 의식을 약화시키고 온전한 진리의 통치를 열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 돌바크 사상의 내적 모호성
    • 아이러니하게도 돌바크 역시 본문 내부에서는 "우둔한 평민의 의견"을 멸시하는 엘리트주의적 회의론을 노출했다.
    • 그는 게으름과 열정 때문에 대중이 진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며, 철학자들의 실제 타깃은 대인들과 평민들 사이에 위치한 '글을 읽고 생각하는 중산층'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글을 읽지도 이성을 발휘하지도 못하는 우둔한 대중(populace)과 광신적 사제들이기 때문에, 철학은 청중을 제한해야 한다는 스피노자나 베일 식의 방어막을 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맥락에 상관없이 '모든 편견의 박멸'이라는 과격한 구호를 멈추지 않았다.

3. 프리드리히 2세의 공적 반박: 인식론적 오만에 대한 저격

  • 지적 겸손의 결여 비판
    • 프리드리히 2세는 돌바크의 저작(『편견에 관한 에세이』 및 『자연의 체계』)을 반박하면서, 저자의 가장 큰 결함이 인식론적 겸손(epistemic humility)의 결여에 있다고 저격했다.
    • 인간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어두운 미궁에 진입할 때는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고 오직 '확률'에만 의존해야 함에도, 돌바크는 이성의 전능함을 믿는 또 다른 형태의 열광주의(광신)에 빠졌다는 지적이었다.
  • 철학적 전제정치와 국가 폭력의 경고
    • 왕은 기존의 종교와 관습을 고려하지 않고 하룻밤 사이에 대중에게 자연-윤리 종교를 강제하려는 돌바크의 유토피아적 변혁 기획을 "가장 혐오스러운 폭정이자 또 다른 형태의 전제정치(despotism)"라고 규정했다.
  • 구체적 논거와 방임주의적 방어
    • 왕은 프랑스 정부가 위그노(개신교) 자녀들을 강제로 가톨릭 학교에 보냈을 때,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가르친 칼뱅 교리문답을 다시 배웠던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켰다. 국가나 특정 철학자가 사적인 가정 내부의 일과 신념에 개입하여 강제로 '진리 교육'을 정초하려 드는 것은 무참한 실패와 폭력만을 낳을 뿐이라는 논리였다.
      • 이로써 절대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가 오히려 개인의 사상 영역에 대한 국가의 laissez-faire(방임주의)를 옹호하며 급진 철학자를 독재자라 공박하는 독특한 지적 촌극이 완성되었다.

베를린 공모전의 전말과 계몽주의의 위대한 역설

1. 1780년 베를린 아카데미 현상 공모전의 진실

  • 질문의 정교한 수정
    • 프리드리히 2세가 달랑베르의 끈질긴 제안을 수용하여 베를린 아카데미에 대중 기만 관련 공모전을 지시했을 때, 아카데미 회원들은 군주의 능동적인 기만을 뜻하는 마키아벨리적 에코를 우려했다.
    • 이에 따라 아카데미는 국왕의 동의를 얻어 질문을 "대중을 속이는 것이 유용한가"에서 "대중이 속는(trompé) 것이 유용한가?"로 수정했다.
  • 'Trompé'의 다의성과 뉘앙스
    • 여기서 프랑스어 수동태 분사 'trompé'를 단순히 지배자에 의한 '의도적 기만'으로만 번역하는 것은 당대 담론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 아카데미가 의도한 본질은, 인간 이해력의 한계로 인해 대중이 스스로 오류에 빠지거나(erring/mistaken) 기성의 편견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지닌 '사회적 유용성'에 관한 것이었다.
      • 아카데미 회원 베겔랭이 질문 속의 "오류"를 "편견"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던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 공모전의 결과와 외면
    • 총 42편의 에세이가 제출되었으며, 그중 20편은 부인(부정)의 답을, 13편은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 아카데미는 기만을 옹호하는 수학자 카스티용(Castillon)의 긍정적 답변과, 대중계몽운동(Volksaufklärung)의 주도자인 베커(Becker)의 부정적 답변 둘 모두에 공동 상을 수여했다.
    • 정작 공모전을 발의했던 프리드리히 2세와 달랑베르는 제출된 에세이들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이 공모전이 그들에게는 이미 1730년대부터 수십 년간 이어온 해묵은 대화의 연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 '반동의 수사학' 혹은 '계몽주의의 파수꾼'

  • 역사적 비판과 벤투리의 프레임
    • 1930년대 파시즘을 피해 망명 중이던 프랑코 벤투리는 프리드리히 2세를 비판한 디드로의 글에 『폭군에 반대하는 페이지들』이라는 제목을 붙여 왕을 전체주의적 Despot(전제군주)의 선조로 박제했다.
    • 아울러 앨버트 허시먼이 말한 '반동의 수사학'—진보적 변화를 무익하거나 역효과를 낳는 것으로 치부하는 논리—을 프리드리히 2세가 대변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 프리드리히 2세의 자기인식
    •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와 볼테르는 자신들이야말로 계몽주의의 진정한 파수꾼이라고 믿었다.
    • 그들이 보기에 돌바크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인식론적 겸손'이라는 계몽의 대원칙을 배신하고, '모든 대중이 진리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무모한 유토피아주의 위에 사회를 재건하려다 개혁의 성과(관용, 사법 개혁, 철학과 정부의 동맹) 전체를 도끼질하는 '새로운 광신자'들에 불과했다.
    • 왕에게는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역사적 맥락에 맞춰 학교 체제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는 것만이 광범위한 종교적 관용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방책이었다.

3. 계몽주의의 역설: "동시에 경멸하고 동시에 계몽하다"

  • 칸트의 교집합
    • 1784년 임마누엘 칸트는 명저 「계몽이란 무엇인가(What Is Enlightenment?)」에서 과감히 스스로 생각하라고 외쳤지만, 이 사상의 공적 사용권은 주로 '학자(Gelehrte)' 집단에게 한정했다.
    • 칸트 역시 혁명이 사고방식을 바꿀 수 없으며, 혁명이 초래한 새로운 신념은 "거대한 생각 없는 대중(great unthinking mass)을 통제하는 새로운 목줄"이 될 뿐이라고 경고했다. 대중을 바라보는 칸트의 이러한 우려 섞인 시선은 프리드리히 2세 및 볼테르의 시선과 고스란히 겹친다.
  • 구체제와 롤랑 그림슬리의 결론
    • 로버트 그림슬리가 지적했듯, 18세기 철학자들은 "인류를 경멸하는 동시에 계몽하는(despise and enlighten mankind simultaneously)" 구조적 역설을 안고 있었다.
    • 그들의 보편적인 언어는 독립적 판단을 예찬했으나, 실제 그 수혜자로 상정된 평민들을 철저히 배제한 채 유산 계급·식자층 남성 엘리트들 내부에서 담론을 정교화했다. states(국가)가 이제 막 기초 교육을 고민하기 시작한 구체제의 농업 경제 구조 속에서 보편적 고등 교육은 상상 불가능한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4. 최종 결론: 가다머의 오류와 이성의 경계 설정

  • 가다머의 오독 교정
    • 본 논문은 계몽주의가 "모든 편견에 대한 편견"을 품고 이성의 절대적 주권만을 밀어붙였다는 가다머의 주장을 결정적으로 무력화한다.
    • 18세기의 주류 지식인들은 이성이 지닌 취약성과 양날의 검 같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가다머가 말한 '인간의 유한성'을 이미 철저히 승인하고 있었다.
  • 이성과 편견의 생산적 동맹
    • 볼테르, 루소, 흄, 달랑베르,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이성 혼자의 힘만으로는 인간 세상을 바꾸거나 대중을 움직일 수 없음을 확신했다. 따라서 그들은 이성을 인간의 열정과 결합하고, 역사적 경험이 검증해 준 '해롭지 않고 이로운 형태의 편견(관습, 도덕 종교)'과 동맹을 맺음으로써만 점진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 프리드리히 2세와 철학자들은 인간의 필연적인 지적 오류와 대중적 편견을 파괴의 대상이 아닌, 인간 처지의 점진적이고 완만한 개선을 위해 동원해야 할 실천적 도구로 정초했던 것이다.